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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8일 목요일

'서울아트시네마 운영자 공모'에 관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의 입장

 

영화진흥위원회의 ‘서울아트시네마 운영자 공모’에 관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의 입장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이하 한시협)는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서울아트시네마 운영자 공모’와 관련해 많은 논의 끝에 이번 ‘2010년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 운영자-서울아트시네마 운영사업’ 공모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첫째, 영진위가 현재 진행중인 공모제는 너무 짧은 일정에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2월 10일) 저녁에 공모안이 나왔고, 일주일도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이후 일 년 동안 사업을 운영할 계획안을 제출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주일 만에 사업자를 마감하고, 또 일주일 만에 단지 사업계획안만을 보고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것은 장기적인 사업계획하에서 진행되어야 할 시네마테크 사업에 파행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공모만을 노리고 준비한 사업자가 없는 한 현행의 공모제는 처음부터 파행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영진위는 공모제와 관련해 공식적인 사업자 설명회나, 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단 한 페이지의 정책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부실한 공모제는 문화예술의 지속성 사업이라기보다는 요식행위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화계와 영진위의 오랜 논의와 협력으로 안정적인 공간마련을 위해 2008년 영진위 예산에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500억 규모의 예산이 마련되었으나 2008년 주어진 예산을 쓰지 않아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복합상영관 설립은 좌초되었습니다. 그 이후 영진위는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과 관련한 아무런 대안 마련 없이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 공모전환을 강행했고 이제 시네마테크전용관 운영자 선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셋째, 공모제로의 전환과정, 합당한 평가 절차 등 보완되어야 할 사항들이 많음에도 그 어떤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진행되는 공모제는 또 한 번의 파행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미 진행되어 물의를 빚고 있는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공모와 관련한 일련의 과정이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영진위는 앞선 공모제 진행에 관해서도 ‘문제없다’라는 입장만 개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넷째,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사업에 대한 지원여부를 판단할 수는 있을지언정 민간이 설립한 서울아트시네마의 운영주체를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는 없습니다.

한시협이 지난 2월 16일 공개한 질의서에도 담긴 내용이지만, 엄연히 서울아트시네마는 한시협이 개관하고 극장을 등록한 고유한 브랜드로 영진위가 마음대로 운영자를 모집할 법적 권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영진위가 허리우드 극장과 직접 계약을 하고 있는 한시협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허리우드 극장주와 계약을 시도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은 명백한 운영권 침해 행위입니다.



시네마테크활동은 1990년대 초반부터 전국의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90년대 후반부터는 고전영화의 필름 상영회를 진행하며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고전영화의 필름상영회가 양적, 질적인 면에서 큰 도약을 이루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시네마테크 단체들은 좀 더 집중적으로 시네마테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시네마테크전용관 설립을 위해 기존에 활동하던 전국의 15개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연합하여 2002년 1월 25일 사단법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를 출범시키게 됩니다.

같은 해 5월 10일에는 전국 시네마테크 단체들의 숙원인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가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개관하였고 그 과정에서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사업이 영화문화 다양성을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 2002년 전용관의 임대료를 지원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시협은 2002년 서울아트시네마 개관 이후 대관 행사를 제외하고 연간 90%의 고전영화, 영화사 거장들의 회고전 및 특별전 등의 프로그램을 개최하며 3,000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했고 40만 명의 관객이 영화와 새롭게 만났습니다.


한시협은 지난 8년 간 한 해 400편이 넘는 고전, 예술, 독립영화를 상영하며 민간 시네마테크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평균 75%에 달하는 유료 관객회원 재가입율을 볼 때 한시협의 활동을 통해 고정적인 관객층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배창호, 이명세, 박찬욱, 봉준호 등의 영화감독들과 안성기, 황정민, 유지태, 류승범, 문소리, 김혜수 등의 영화배우들 그리고 정성일, 김영진 등 영화평론가들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함께 개최하며 시네마테크를 알리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한시협은 전국적인 시네마테크 단체들을 대표하면서 국내에 시네마테크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비영리 상영방식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영진위의 일부지원금 외에도 다양한 자체 수익사업 및 후원사업으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해 왔고, 국내외의 시네마테크와 많은 문화단체, 대사관, 관공서 등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국제적인 문화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또한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운영 외에도 지역 시네마테크네트워크 사업을 통해 전국의 시네마테크 단체들과 함께 연간 20여 건의 지역순회상영 지원, 지역자립형 사업지원, 지역인프라구축을 위한 지역인력교육사업 등 시네마테크 활동이 전국적으로도 확산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 8년간 커다란 성과를 내왔고 문제없이 진행한 시네마테크에의 지원사업을 공모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새로운 정책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그동안 한시협은 서울아트시네마와 시네마테크네트워크 사업을 운영하며 연간 4차례의 분기 보고서와 1년 동안의 실적 보고서를 제출했고, 2009년에는 세 차례의 감사를 받았지만 사업 수행에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2009년 4월 29일 있었던 시네마테크지원사업 수행평가에서는 평균점수 85점을 받으며 “‘사업계획’(30점) 영역에 따른 4개 항목, 6개 세부항목에 대한 평가는 다른 영역에 비해 월등히 높은 점수를 받았음. ‘운영목표의 명확성’ ‘시네마테크 전용관 사업 이해도 및 취지 부합성’ 등의 세부항목에 대한 평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등의 문제가 없었기에 갑자기 시네마테크를 공모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적 변경이 어떤 근거에서, 어떤 목적으로 진행되는 가에 대해 한시협은 영진위가 보다 책임있는 논의와 판단을 내려야 함을 역설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과를 보면 영진위는 정책결정자로서의 책임있는 논의와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고, 급기야 시네마테크 지원사업을 공모로 전환하는 확실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지난 2월 10일 일방적으로 공모안을 공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영진위가 정책기관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공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입장을 들려주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하지만 영진위는 이와 관련해 아무런 노력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시협은 시네마테크의 지원사업에 대한 중장기적인 정책마련과 제도의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시네마테크의 공모제에 참여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2010년 2월 17일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광주시네마테크, 대구시네마테크,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대전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시네마테크 부산, 씨네오딧세이(청주), 제주씨네아일랜드)

2010년 2월 16일 화요일

영화진흥위원회의 '서울아트시네마 운영자 공모'에 관한 공개질의

영화진흥위원회의 '서울아트시네마 운영자 공모'에 관한

공개질의

 

 

지난 2월 10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2010년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 운영자 선정 공모’ 공고를 통해 접수를 시작했습니다.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이하 한시협)는 공식입장을 표명하기 전 공지된 공모 내용에 몇 가지 의문을 해소하고자 영화진흥위원회에 아래와 같이 질의합니다.

 

1.

2002년 개관한 서울아트시네마는 한시협이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전용관이며, ‘서울아트시네마’는 해당구청에 한시협 대표자의 이름으로 <영화상영관등록>이 되어 있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영진위는 ‘2010년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 운영자 선정 공모’ 내용에서 사업명을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운영 및 지역 네트워크 활동 지원 사업’으로 명기함으로써 시네마테크전용관사업 운영자가 그 사업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수행하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표명하였습니다.

이는 한시협이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상영관 명칭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부정경쟁방지및영업비밀보호에관한법률 상의 권리를 명백히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영진위는 어떤 근거에서 ‘서울아트시네마 운영자’를 공모하는 것입니까?

 

 

 

 

2.

주택 임대차의 경우에도 본인이 이주할 곳의 계약 종료 시점이 언제인지 먼저 확인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한시협은 임대인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적도 없으며 한시협과 허리우드극장과의 계약기간이 2010년 3월 31일까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운영약정기간을 2010년 3월 1일’로 명기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3.

영진위는 지난 2009년 ‘넥스트플러스 여름영화축제’ 운영처 선정 시 ‘영화진흥위원회 예산회계규정 제82조(입찰자의 지명), 제83조(지명통지), 제63조(경쟁방법)에 의거, 지명경쟁입찰에 1개사만 등록할 시에는 자동유찰로서 재통보(공고)를 통한 입찰을 진행하여야 했으나 1개 등록사를 대상으로 적격 여부 심사를 진행한 점이 규정에 어긋남을 지적받은 바, 2009 넥스트플러스 영화축제 프로그램 및 마케팅 업무 운영처 선정의 공정성 제고를 위해 재공모’를 실시하겠다고 넥스트플러스 영화축제 관련단체들에 공지한 바 있습니다. ‘넥스트플러스 여름영화축제’ 보다 운영기간과 예산 면에서 규모가 큰 사업자를 선정함에 있어 ‘1개 단체 지원 시 적격여부 판단하여 선정할 수 있음’으로 공지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4.

마지막으로, 본 사업에 관한 공모제 전환 결정 및 공모 내용에 관하여 영진위 9인위원회의 의결을 거쳤는지 질의하며, 이미 위원회 의결을 거친 사항이라면 해당 안건이 논의된 회의차수 및 안건을 공개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2010년 2월 16일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광주시네마테크, 대구시네마테크,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대전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서울시네마테크, 시네마테크 부산, 시네필 전주, 씨네오딧세이(청주), 영화사 진진-시네마테크 사업팀, 제주씨네아일랜드, 퀴어아카이브 서울)

 

 

 이런 망할.. 나라녹을 먹는게 진짜 마약보다 무서운 거로구나.

 

2010년 2월 8일 월요일

미디액트는 지금?

 

문제는 이게 미디액트로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네마테크까지 건들이면.. 그땐 전쟁이다

화이팅 미디액트!

2010년 2월 4일 목요일

“세종시 원안은 사회주의 도시”

ㆍ권태신 총리실장, 색깔 공세… ‘박근혜의 신뢰론’ 비판도

여권의 세종시 수정 논쟁이 급기야 ‘색깔론’으로까지 번졌다.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이 3일 세종시 원안을 “사회주의 도시”에 비유하고, 수정안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지도자 자질을 거론하고 나서면서다. 세종시 논란이 인신공격의 비난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권 실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친이계 최대 모임인 ‘함께 내일로’의 세종시 토론회에서 “우리가 발을 잘못 내디디면 금방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세종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면서 “도시전문가들 말로는 ‘원안대로 하면 사회주의 도시가 된다’고 한다”고 말한 것으로 참석자들이 전했다. “세종시 원안은 그 자체가 수도 분할로 50년, 100년 뒤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극단론도 폈다.

권 실장은 특히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신뢰론’을 겨냥, “신뢰는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충청도 등을 나쁘게 만드는 것을 갖고 신뢰를 내세우는 것은 지도자,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바른 게 아니다”라고 공박했다. 사실상 박 전 대표의 지도자 자질을 문제삼은 것이다. 박 전 대표의 “신뢰를 돈으로 환산하면 300조원”이란 발언에 대해서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시한 300조원은 신뢰비용 아니고, 사회 갈등에 따른 비용으로 신뢰와는 관계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2005년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으로 행정부처 이전에 찬성한 것에 대해선 “부처 이전이 이뤄질 때면 공무원을 안할 것이니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는 다소 무책임한 해명도 내놨다.

친박계는 즉각 반발했다. 현기환 의원은 개인 성명을 통해 “권 실장은 참여정부 때 청와대에서 세종시에 직·간접 관여했던 사람으로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며 “국민과 국익보다는 권력에 해바라기 하는 공무원을 국무총리는 엄중 문책해 공직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날 고위 당·정협의회를 열고 세종시 수정법안을 2월 임시국회 종료 후인 3월에 제출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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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들 "신해철 무혐의, 항고하겠다"

가수 신해철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고발했던 보수단체들이 최근 검찰의 무혐의 처분과 관련, 항고의 뜻을 밝혔다.

라이트코리아, 납북자가족모임,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4일 항고장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5일 오후 3시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계획이다.

이들은 "신해철 무혐의 처분은 국보법이 검찰에 의해 사문화(死文化)된 것"이라며 "검찰이 최근 강기갑 국회폭력 무죄, 전교조 시국선언 무죄, MBC PD수첩 무죄선고 등 잇따른 법원의 편향적 판결을 의식해 '기소 기피' 증세를 보인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앞서 신해철은 지난해 4월 북한이 로켓(광명성 2호)을 발사한 것과 관련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케트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라는 글을 게재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에 라이트코리아와 자유북한운동연합은 신해철의 발언에 대해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하는 행위'라며 같은달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이진한)는 지난달 29일 "신해철의 발언이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이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한편, 신해철은 지난 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무혐의 유감(ㅋ)'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표피적으로 보면 단순한 해프닝"이라며 "수사 단계에서의 무혐의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현 정권에서 시작된 대국민 겁주기라는 민주주의의 명백한 퇴보 현상이 이 해프닝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일개 음악인이지만 내가 생각하고 말 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내가 겪었던 짜증스러운 시간, 이 조그만 해프닝이 이 시대의 부당함을 증거하는데 자그마한 표시라도 된다면 일생의 보람으로 생각하겠다"고 글을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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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좀 짜증난다고-_-

2010년 2월 3일 수요일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이동북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1.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는 통일 논의의 아이러니


   우리나라는 금년에 국토분단(國土分斷) 63주년, 국가분단(國家分斷) 60주년을 넘겼습니다.  우리는 보통 30년의 세월을 한 ‘세대’로 보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분단사(分斷史)는 벌써 두 세대를 지났습니다. 


   이 같은 ‘분단’의 장기화는 민족적 불행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루 빨리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당연한 민족지상의 과제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슬로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입니다.


   여기서 통일지상주의(統一至上主義)가 싹텄습니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분단은 절대악” “통일은 절대선”이라는 관념론적 흑백논리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은 어떠한 통일이라도 좋다”고 통일을 절대화하는 통일만능론(統一萬能論)이 휩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아니면 분단”,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도식적인 이분법(二分法)도 등장했습니다. 통일론자가 아니면 분단론자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분단론자는 통일반대론자와 같은 말이 되어 지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흑백논리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허구의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즉, “통일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일인데 통일반대론자들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허구의 논리’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북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엉뚱한 삼단논법(三段論法)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즉,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민족단결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단결에 반대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입니다.  북한 사람들과 남쪽에서 북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삼단논법은 1970년대 초 남북대화 초창기에 북한 대표가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거꾸로 다음과 같이 맞섰습니다.  “공산주의를 주장한다는 민족단결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단결에 반대한다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 말이 어떠냐”고 들이댔습니다. 그랬더니 북한 대표는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2. 통일반대론자는 없다 -  있는 것은 통일신중론자일 뿐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을 통일지지세력과 통일반대세력으로 나누어 이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도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이라는 ‘이슈’가 국민을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逆)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는데 이용되고 있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통일반대론자가 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통일에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일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크게 볼 때, 그 차이는 ‘통일지상론’이냐 아니면 ‘통일신중론’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통일신중론(統一愼重論)은 통일에 대한 무조건 반대가 아닙니다.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되,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통일이 ‘내용’면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방법’에 관하여 신중을 기(期)하자는 것입니다. 즉, ‘좋은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되, ‘나쁜 통일’을 수용하는 바보스러운 짓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통일신중론자들을 마치 통일반대세력이나 분단지향세력인 것처럼 매도하는 ‘역(逆) 매카시즘’이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아주 단순화시켜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만 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다분히 주술적(呪術的)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신념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목격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경우에는 어느 사이엔지 통일이 기독교의 ‘낙원’이나 불교의 ‘극락’으로 둔갑하여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온갖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하는 ‘마취제’나  ‘최면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3. 신라의 삼국통일은 ‘속 빈 강정’ - 잃은 것도 많았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古代) 한국의 강토였던 한반도와 만주(滿洲)에는 본래 단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 시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모호했습니다. 그  이후 이 땅에는 고구려(高句麗; BC37-AD668)ㆍ백제(百濟; BC18-AD660)ㆍ신라(新羅;  BC57-AD935)의 삼국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羅ㆍ唐) 연합군에 패망하면서 우리 역사상 첫 ‘통일국가’인 통일신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통일국가’로서의 통일신라의 위상은 논란과 시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신라의 삼국통일은 자력이 아니라 외세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꺼풀 속을 드려다 보면, 신라의 통일은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 신라:    BC57-AD935

      - 고구려: BC37-AD668

      - 백제:    BC18-AD660


   고구려 패망 30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고토(故土)였던 만주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渤海)가 건국됩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신라의 존속기간은 발해가 건국될 때까지의 30년간에 불과합니다. 이때부터 발해가 멸망한  926년에 이르는 228년간의 기간에 우리나라는 북의 발해와 남의 신라로 갈라진 또 하나의 ‘분단국가’였습니다. 


  게다가 남쪽 신라의 영토 내에서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전개됩니다.  900년에는 견훤(甄萱)의 후백제가, 그리고 다음 해인 901년에는 궁예(弓裔)의 태봉이 등장하여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918년에 태봉에서 정변이 일어나 왕건(王建)이 궁예를 내몰고 고려(高麗)를 개국합니다.  왕건은 935년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다음해인 936년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 통일을 이룩합니다. 



4.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 기간은 고려와 조선의 974년간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고려(高麗,936-1392), 조선(朝鮮, 1392-1910)으로 이어지는 974년간의 ‘통일국가’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 역시 완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토가 지나치게 위축되었습니다. 고려 초기에  국토는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 6鎭과 4郡 설치


   456년간에 걸친 고려 왕조 대부분도 주로 북쪽의 외세와의 무력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서 연달아 나타난 거란족의 ‘요(遼)’ 나라, 여진족의 ‘금(金’) 나라, 몽골족의 ‘원(元)’ 나라와 끊임없이 무력충돌하면서 국경선을 조금 씩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고려의 국경선이 겨우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新義州) 근처에 도달한 것은 6대 임금 성종(成宗) 때인 993년경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경남도 함흥(咸興) 근방에 6성을 쌓은 것이 15대 임금 숙종 때인 1104년경이었습니다. 


   1239년부터 시작된 40년간의 대몽(對蒙) 항쟁을 거치면서, 고려는 한 때 원(元) 제국의 부마국가(駙馬國家)로 전락합니다.  이 기간에 ‘원’ 제국이 쌍령총관부(雙嶺總管府)와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함에 따라, 고려의 국토가 옛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때의 크기로 줄어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국토가 두만강까지 확장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400년대 조선(朝鮮) 왕조 4대 임금, 세종대왕 때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숙명적 과제인 나라의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민족사의 큰 흐름 속에서 생각해 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5. 모든 통일이 다 좋은 것 아니다 - 분단에도 양면이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분단’은 유독 우리 세대만이 유일하게 겪는 고통스런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통일’에 이르는 길도 순탄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는 했지만, 과거의 통일은 모두 무력에 의한 유혈통일(流血統一)이었습니다.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외세의 힘을 빌어서 무력으로  달성하는 과오도 범했습니다.


   이 같은 통일을 통해 통일이란 목표는 달성했지만, 그 대가로 잃는 것도 많았습니다.  가장 뼈아팠던 것은 국토의 상실이었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이룩하는 대가로 만주라고 하는 광대한 영토를 잃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해야 할 운명의 우리 세대는 이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분단보다 못한 통일을 선택하거나, 또는 분단 상태에서 가졌던 소중한 것들을 통일과정에서 잃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롭게 통일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단 상태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미덕시(美德視)하고 분단을 죄악시(罪惡視)하고 있는 데,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6. 6.25 남침이 남긴 깊은 상흔이 분단의 가장 큰 상처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하여 6.25남침이라고 하는 엄청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김일성의 공산북한은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1950년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전면남침을 감행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3년간에 걸친 ‘6.25전쟁’이라는 이름의 비참한 국제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 국토는 폐허가 되고, 수십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침은 1천만명 이상의 남북의 동포들에게 가족이산이라는 단장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쟁은 1953년 ‘휴전’이라는 형태로 겨우 봉합되었습니다만, 그 후에 한반도에서는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어 불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구호 아래 한-미동맹(韓-美同盟)을 주축으로 하는 ‘전쟁억지력’을 유지함으로써, 겨우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사이비(似而非) 평화”나마 유지해 왔습니다. 


   또한 남북의 두 동족사회 사이에서는 서로를 거부하는 철저한 단절과 고립 속에서 엄청난 사회적 이질화(異質化)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무력남침과 폭력혁명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남조선혁명’의 구호 아래 대한민국의 공산화(共産化)를 집요하게 추구해 왔습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의 적화통일(赤化統一)의 위협 때문에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인권의 심각한 제약과 갖가지 생활의 불편이 강요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7. 남북의 상반된 선택 - 그 결과가 오늘의 한반도 현실


   그러나 이 같은 국토분단ㆍ국가분단ㆍ민족분단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단은 하나의 역사적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1948년 남과 북은 남의 대한민국과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국가의 수립을 통하여 한민족의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상반(相反)된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북의 ‘선택’은 공산주의와 독재,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입각한 명령사회, 그리고 폐쇄와 고립화였습니다. 남의 ‘선택’은 민주주의와 자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경쟁사회, 그리고 개방과 국제화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세대들의 이 같은 선택의 결과는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1948년에 이루어진 남북의 이같이 상이(相異)한 선택의 결과로, 지금 남쪽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발전과 번영의 모습은 정말로 민족사적으로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 지표(指標)를 통하여 확인해 봅니다.


   1953년 13억 달러였던 대한민국의 GNP는 2004년에는 그 523배인 6,810억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1인당 GNP는 53년의 67 달러에서 2004년에는 그 211배인 14,162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2004년도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세계 11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 ①미국, ②일본, ③독일, ④영국, ⑤프랑스, ⑥이탈리아, ⑦중국, ⑧스페인, ⑨

       캐나다, ⑩인도, ⑪한국


   대한민국의 경제는 1954년 처음으로 5.6%의 성장률을 기록한 이래, 1956년과 1980년의 두 해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플러스’ 성장을 계속해 왔습니다. 산업구조는 그 비중이 1차 산업으로부터 3차 산업으로, 경공업 위주로부터 중화학공업 위주로 크게 이동하여 선진국형 산업구조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의 해방 당시와 2005년의 광복 60주년 사이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각종 경제지표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1945년 대비 쌀 생산량이 2.7배, 철강 생산량이 59.400배, 자동차 생산대수가  50만배, 시멘트 생산량이 6,037배, 선박 건조량이 약 1,900배로 늘어났습니다. 수출액은 52년 대비 9,200배로 늘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 분단 당시 경제는 북한이 압도 - 지금은 비교 의미 상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역사적 사실은 1948년 국가분단 당시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45년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 역청탄의 98%, 전력의 92%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또 1960년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1인당 GNP는 94 달러 대 137 달러, 수출액은 3천3백만 달러 대 1억5천4백만 달러로 북한의 경제가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비록 GNP에서는 19억 달러 대 17억 달러로 남이 약간 앞섰습니다만).


   그리고 남북한의 본래의 경제구조는 남농북공(南農北工), 남경북중(南輕北重)의 상호보완형으로 북이 주도하는 우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분단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남북한의 경제는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북한의 경제는 북한이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중지했습니다. 1994년 이래 선고만 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은 파산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경제력 비교>(2004년)


     - 인구        48백만:23백만 명    = 1/2

     - GNI        6,810억:208억 달러   = 1/33

     - 1인당 GNI 14,162:914 달러      = 1/15.5

     - 무역총액    4,783억:29억 달러    = 1/167

     - 수출        2,538억:10억 달러    = 1/149

     - 수입        2,244억:18억 달러    = 1/122

     - 발전설비    5,996만:777만 kw    = 1/7.7

     - 발전량      3,421억:206억 kw/h  = 1/16.6

     - 원유도입량  82,579만:390만 배럴  = 1/212

     - 자동차      347만:4,500 대       = 1/771

     - 강철        4,752만:107만 톤     = 1/44.5

     - 시멘트      5,433만:563만 톤     = 1/9.6

     - 비료      361만:43만 톤        = 1/8.3

     - 화섬        198만:2.5만 톤       = 1/79    


   지금 북한의 산업설비 가동률은 30%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굶주린 근로자들이 유휴설비들의 환금가치(換金價値)가 있는 부품들을 모두 뜯어내어 양식과 바꾸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휴설비들은 이제 고철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덜 난 경제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수백만의 주민이 굶어 죽었습니다. 수만명, 어쩌면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몰래 건너서 만주 벌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북에 남은 주민들은 서방세계의 인도적 지원으로 겨우 집단 아사(餓死)를 모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북한이 1차 7개년 계획에 착수한 직후인 1962년 11월, 김일성은 이 계획이 완료되면 북한 동포들에게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1948년에 이루어졌던 남과 북의 상반(相反)된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 미국 Foreign Policy와 Fund for Peace의 ‘2006년도 실패한 국가지수

     (Failed States Index)’에서 조사대상이 된 146개국 가운데 북한은 14

     위 [수단(1), 콩고민주공화국(2), 코트디봐르(3), 이라크(4), 짐바브웨(5), 차

      드(6),  소말리아(7), 아이티(8), 파키스탄(9), 아프가니스탄(10)], 한국은

     123위 [독일(124), 스페인(125), 이탈리아(127), 미국(128), 프랑스(129),

      영국(130), 싱가포르(133), 일본(135),,,  호주(139), 뉴질랜드(141), 스위스

      (142), 아일랜드(143), 핀란드(144), 스웨덴(145), 노르웨이(146)]  (‘성공

     한 국가지수’로는 23위)


 

9. 1948년에 통일을 선택했다면 한반도는 이미 공산화


   여기서 우리는 1948년의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이 분단이 아닌 다른 것, 즉 무리를 하고라도 우격다짐으로 통일했을 경우에,  오늘의 현실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듯 합니다. 


   1948년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그 때 우리의 선택이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었다면, 그 선택이 초래한 결과는 다음의 어느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미ㆍ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였던가, 아니면 ‘공산화 통일’이었든가, 아니면 겉은 ‘중립화 통일’이지만 속은 ‘공산화 통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더라도, 그렇게 성취된 ‘통일국가’가 지금 갖고 있을 모습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못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더라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여전히 좌우대립(左右對立)의 사상적 ․ 이념적 혼미 속에서 방황을 계속하고 있거나, 아니면 ‘공산화’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통일국가’가 실현되었더라면, 지금 그 통일국가는 오늘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학생 여러분의 모습은 김정일이라는 독재자를 무조건 숭배하고 찬양하면서 살고 있는 북한의 학생들이나 아니면 ‘농민시장’ 바닥이나 다리 밑을 헤매는 ‘꽃제비’들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KBS-TV의 ‘통일전망대’나 MBC-TV의 ‘남북의 창’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통일된 국가’가 통일은 되었지만 ‘공산화’까지는 되지 않은 나라였다면, 지금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수많은 아시아ㆍ아프리카 신생(新生) 독립국가들의 운명과 같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동안 남북의 두 상이(相異)한 체제 간에 벌어진 엄청난 발전의 격차는 1948년 당시 이승만(李承晩), 김성수(金性洙)와 같은 대한민국 건국주역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인 차선책(次善策)의 차원에서 통일을 “잠시 유보”하면서 분단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분단이  반드시 죄악일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옳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건국 당시 분단의 선택은 곧 ‘체제’와 ‘이념’의 선택이었습니다.  분단을 선택한 결과로 그 동안 남북 간에는 사활(死活)이 걸린 체제경쟁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서로 우열(優劣)을 다투는 치열한 경쟁이었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정글의 규칙이 지배하는 체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북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10. 압축성장으로 체제경쟁 승리 - 그 뒤엔 어두운 그늘도


   대한민국은 이 체제경쟁의 승자(勝者)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체제’와 ‘이념’의 승리입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예컨대 박정희(朴正熙)의 “일면 국방ㆍ일면 건설”이나 “잘 살아 보세”와 같은 구호 아래서 “하면 된다”(Can Do)는 정신으로 뭉쳐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결과인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결코 ‘분단’을 미화(美化)하거나 예찬해서는 안 됩니다.  분단은 어디까지나 불가피했던 “차선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단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수많은 긍정적인 일들을 의도적으로 부정ㆍ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자원ㆍ기술ㆍ자본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인력뿐인 불리한 상태에서,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끊임없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발전과 번영을 이룩해 냈습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한-미동맹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던 다른 나라에서도 수백년이 걸렸던 산업화를 대한민국이 불과 2-30년 사이에 이룩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압축성장(壓縮成長)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압축성장에는 사회적 갈등이라는 대가(代價)도 있었습니다. 북으로부터의 안보 위협과 사회적 갈등을 무릅쓰고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의 억압과 인권의 제약,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나는 정치적ㆍ사회적 갈등으로 대한민국은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일단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그 힘으로 오늘날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정착시켜 나가게 된 것입니다.



11. 세습독재의 북한은 세계 최악의 ‘실패한 국가’


   반면, 북한은 ‘수령독재’라는 이름으로 봉건왕조(封建王朝)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역사의 유물인 ‘세습독재(世襲獨裁)’를 60년 동안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2천3백만 동포들을 수용소 속의 ‘노예상태’로 묶어 두어 왔습니다. 그 결과로 북한은 오늘날 바깥 세계로부터 고립ㆍ단절된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1948년의 국가분단 시점에서 자원ㆍ기술 모두 남한을 압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국제 평가기관들에 의해 200여 세계국가 가운데서 가장 ‘실패한 국가’의 하나로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개혁ㆍ개방’ 마저 거부하면서 이미 실패해 지구상에서 도태되어 버린 사회주의 명령경제(命令經濟)를 고수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정해야 할 사실은 1945년 이후 남쪽의 우리가 분단을 선용(善用)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본 반면, 북쪽의 저들은 분단을 악용(惡用)함으로써 절망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토분단 63주년, 국가분단 6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체제경쟁의 당당한 승자(勝者)의 입장에서 ‘통일’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리(時利), 즉 시간상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1948년에 ‘분단’이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통일’도 당연히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체제경쟁의 승자인 대한민국의 몫이지, 패자(敗者)인 북쪽의 몫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미 실패한 북의 체제가 무대로부터 퇴장하기 전에 잔열(殘熱)을 불태우는, 다시 말해 임종(臨終)을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종착역을 아는 이상 우리에게는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세기를 넘긴 분단 기간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바야흐로 문이 열리려 하고 있는 새 천년의 유장(悠長)한 시공간(時空間)에 비추어 보면, 수유(須臾), 즉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나무 가지에 달린 채 썩고 있는 감을 굳이 따내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절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12. 통일은 승리한 체제 주도해야 - 당장은 분단관리가 중요


   독일통일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통일이 되면 남북 간에 조성된 경제발전의 격차(隔差)는,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간에, 남쪽의 재력(財力)으로 메워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려움은 아직도 우리의 국력(國力)이 당시의 서독만큼 충분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세계 2위였던 구 서독(西獨)의 엄청난 국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통일 이후 최근까지 소화불량성 배탈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지금의 국력을 가지고 ‘독일식 통일’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과연 그로 인한 후유증이 독일의 배탈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自明)합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아직은 설익은 ‘통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력을 더욱 키워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독일식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허리끈을 더 졸라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내부에는 북한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방법론(方法論)의 차원에서 통일 문제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상당히 강합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노력은 도로(徒勞)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극단적으로 이질적(異質的)이고 상호 부정적인 남북의 두 체제가 ‘통일방안’에 관한 합의를 이루어낼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 노력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짓거나 신기루(蜃氣樓)를 쫓는 환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와는 달리 통일될 때까지 거처야 할 일련의 과정(過程)을 착실하게 관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의미하는 것은 한마디로 “분단을 관리(管理)”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통일국가라는 ‘결과’보다는 분단관리라는 ‘과정’에 치중해야할 시기입니다.  분단관리의 단계를 도외시하는 통일국가 논의는 한낱 정치적 선전구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문제를 풀기 위한 우리의 현실적인 노력은 우선 남북 간의 분단상태를 제도화(制度化)하여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북한에서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체제변화가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는 북한의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수령독재체제가 해체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쌍방의 두 상이(相異)한 체제가 통합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할 정도의 “가치의 상사성(相似性)”과 “체제의 상용성(相容性)”이 확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13. 통일은 이제 기성세대가 아닌 새 세대의 과제


   분단 및 통일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것은 분단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분단과 통일의 주도세력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분단을 직접 체험한 분단 이전 세대의 전유물(專有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선택(選擇)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當爲)의 문제였고, 이성(理性)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感性)’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분단은 “본래 하나였던 것을 인위적으로 둘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인구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분단 이전 세대는 숫자 면에서 격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구의 80% 이상에게 분단은 그들이 스스로 체험한 ‘직접적 사실’이 아니라, 그 부모 세대를 통하여 전해들은 ‘간접적 사실’일 뿐입니다.  따라서 통일 역시 이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현실적 문제라기보다는, 머리로 오는 관념적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에게 통일은 관념적으로는 ‘절대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상대적’ 이슈로 퇴색하고 있습니다(일부 의식화된 운동권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이긴 합니다만).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북한의 존재를 ‘감성적’ 상대보다는 ‘이성적’ 상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분단과 통일의 문제도 ‘감성적’ 차원보다는 ‘이성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분단이전 세대’에게 원상회복(Status Quo Ante)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재통합(Reunification)의 문제였다고 한다면, ‘분단이후 세대’에게는 하나의 창조적 가치로서 새로운 통합(New Unification)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차이는 앞으로 우리의 ‘통일정책’의 향배(向背)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 하면 인구의 연령별 분포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어제까지는 분단과 통일의 영역이 전전(戰前) 세대인 기성세대의 전관수역(專管水域)이었지만, 이제는 전후(戰後) 세대인 신세대의 영역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

2010년 1월 30일 토요일

공산혁명을 추구했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노맹은?

 

1981년 11월 결성 당시 ´출범 선언문´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매진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데 이어 91년 12월 ´특별성명´ 제7호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제하로 당 건설 전략을 밝히는 등 출범이래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끈질기게 추진해 왔다.

 

사노맹의 성격

 

사노맹은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자칭하며 "전투 사령부"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의 무기"라고 주장하며 당의 사상은 사회주의를 핵심으로 하고 혁명전략은 반제-민족해방 혁명과 반파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당원 확보 대상은 공장에 부식된 혁명소조들을 근간으로 하여 빨치산 출신 장기수, ´남민전´ 등 간첩사건으로 복역하다 출소한 좌익수, 재야운동권의 사회주의 신봉자, 운동권 출신 복역자.해외 유학자 등이다.

 

사노맹의 임무

 

사노맹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하게 될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면임무 5개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계급의식화

둘째, 당의 핵심지도자 발굴과 혁명운동 진전을 위한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

셋째, 각계 각층으로부터 동조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동맹세력 획득

넷째, 자본주의 체제 철폐를 위한 노동자계급 등 민중의 혁명적 정치투쟁 지도

다섯째, 남한의 사회주의 진영의 강화를 위한 국제 사회주의 진영과 연대

 

사노맹은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조직 및 운영원칙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와 엄격한 규율을 특징으로 하는 공산당식 ´민주집중제´를 채택했다.(민주집중제 :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은 허용하되 결정된 정책과 노선에 대해서는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공산당 운영 원칙)

 

´당´ 건설 방법

 

사노맹은 대중 투쟁속에서 대중의 지지.보호를 받는 대중적 전위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면서 당 건설의 선결과제로 △사상적인 면에서 당 건설에 대한 전 좌익진영의 정치, 사상적 통일과 당 강령 제시 △조직적인 면에서 교수, 언론인, 남로당.통혁당 인사를 망라하여 혁명의 조직주체 확립 △물질적 측면에서 지속적이고 안정된 혁명활동을 수행할 비합법 진지 구축 및 재정적 기초확립을 제시했다.

 

사노맹은 빨치산의 후예

 

"사노맹은 각족 투쟁선언문을 통해 "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지리산과 태백산맥을 휘어돌며 미제국주의와 파쇼정치에 맞서 힘차게 투쟁할 때만 해도 반도의 남쪽땅에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통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끊겨 있던 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실날을 이어 사회주의 혁명투쟁에 살고 죽으려 한다"는 등 조직의 목표를 빨치산의 전통을 계승,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후 궁극적으로 북한과의 연대를 실현, 한반도를 공산화할 것임을 투쟁을 목표로 제시했다.

 

김일성을 ´통일주의자´, ´평화주의자´로 극찬

 

사노맹은 북한의 폐쇄적이고 비참한 사회실상을 외면한 채 조직원들에 대한 사상교양 등을 통해 "우리가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것처럼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을 숭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양반의 앞잡이였던 이순신, 민족주의자에 불과한 김구에 대한 교육은 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 등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식´에 의한 통일실현 주장

 

사노맹은 한반도의 통일실현에 있어 북한과의 연대는 당면 혁명 승리의 중요한 고리가 된다고 인식하고 북한이 대남적화실현을 위한 통일전선 공작 차원에서 끊임없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통일 정치협상회의´ 소집 등을 통해 연방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노맹은 학원을 어떻게 장악해왔나?

 

사노맹은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소위 노동자계급과 동맹관계에 있는 학생 운동조직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하에 사노맹 산하에 ´사회주의 학생 연구소´라는 비밀 지하조직을 두고 정예조직원을 양성, 학원가에 침투시켜 학생 혁명 전위조직인 ´전민학련´(전국 민주주의 학생연맹.JDSL)을 결성했다. 

전민학련은 사노맹의 지령에 따라 전국 70여개 대학에 민학련(DSL)을 결성해 각 대학별로 ´투쟁결사대´를 조직, 학원가 집회는 물론 각종 정치집회와 노사분규 현장에 참여해 화염병 투척, 각목투쟁 등 무차별 폭력투쟁을 자행하는 한편 고교생까지도 혁명대열에 끌어들이기 위해 ´고등학생 정치활동 쟁취를 위한 공동실천 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사노맹의 소위 ´조직보위´ 실상

 

사노맹은 혁명적 사회주의자 조직이 전무한 ´반동의 땅´ 남한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강철같은 규율로 무장해야한다면서 ´선진 활동가의 10대 보위수칙´이라는 조직보위 지침을 제정, 생활화했다.

 

이들은 ´빨치산의 후예´답게 죽음으로써 사수한다는 결의 아래 청산가리 등을 이용한 자살용 독극물을 개발하고 비밀아지트에 가스총, 도검류 등을 상시 비치, 수사관들의 검거에 대비해왔을 뿐 아니라 음어.약어 사용, 무인포스트 운영 등 간첩조직을 능가하는 2중.3중의 보안장치를 마련하는 등 비밀활동을 생활화했다.

 

이들은 아지트 단위별로 ´비상시 긴급대피 계획´ 등을 마련하고 "적(수사기관)이 급습시 대적 방어조가 중심이 되어 가스총과 각목으로 대항한다", "격투틈을 이용, 핵심간부를 피신시키고 조직문건을 소각한다", "대피가 불가능할 경우 자결로 조직을 보호한다"는 등의 자체 보위원칙을 정하고 수사기관의 검거에 대비해왔다.

 

사노맹 주요 인물 박노해, 백태웅

 

정통 마르크시즘을 신봉하고 자신들의 주된 활동무대를 노동계로 생각했다.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박노해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었던 백태웅이라는 쌍두마차가 이론으로 무장되어 조직적으로 사노맹을 이끌었다. 제2의 남로당을 표방하고 노동자들의 혁명을 추구했다.

 

박노해의 본명은 박기평이다.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고, 詩人이며 버스 운전기사를 하기도 했다.
全南 함평 출신이며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
92년 사노맹 사건으로 검거 당시 옷은 거의 외제였고 많은 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 노동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백태웅은 부산 동성고등학교와 서울 법대를 나왔고 아버지가 순경이었다. 학창시절 수배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자수를 하면 불구속으로 해준다고 경찰과 거래를 했는데, 그 약속이 경찰측으로부터 지켜지지 않고 구속이 되어버린다. 백태웅의 아버지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고 죽게 된다. 이에 92년 검거될 때까지 공산주의 활동을 더욱 가열차게 하게 된다.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씨네21)언제 또 쫓겨날지...

1990년대 이래로 ‘새로운 영화보기’를 내세운 서울의 문화학교 서울, 서울시네마테크, 하이퍼텍나다, 일주아트하우스, 전주의 온고을 영화터, 광주의 영화로 세상보기, 청주의 씨네 오딧세이, 제주의 씨네 아일랜드 등 전국의 젊은 영화 애호가들이 주축이 된 시네클럽이 성장해 지금의 시네마테크가 됐다. 이미 한국의 시네마테크들은 서울을 포함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1999년 부산은 처음으로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설립해 시네마테크가 상영관과 교육시설을 갖춘 모습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전까지 시네마테크는 상상의 영역이었다.

오랜 논의를 거친 끝에 2002년 전국적인 시네마테크네트워크 조직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설립됐고, 같은 해 서울에도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했다. 시네클럽의 활동이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난 뒤였다. 개관 이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3천편이 넘는 영화가 상영됐고 40만명의 관객이 영화와 새롭게 만났다. 5주년을 맞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와 이제 10년의 시네마테크를 준비하는 즐거운 상상으로 축배를 들어야 하건만 10년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험난하며 풀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주인 바뀌고, 가게는 매년 이사하고

첫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출범하기 이전부터 국내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처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안정적인 상영관 확보였다. 이 문제는 2002년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하고 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1년 단위의 임대계약으로 공간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시네마테크 부산이 부산시에서 장기적인 임대공간을 제공받고 동일한 장소에서 10년간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에 비하면, 서울아트시네마는 제법 안정적인 활동이 무르익어가던 2005년, 아트선재센터로부터 임대 재계약 불허 통보를 받고 지금의 낙원상가 건물로 이전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시네마테크는 일종의 단골 극장이다. 주인이 매번 바뀌고, 가게는 매년 이사하면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둘째, 부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시네마테크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영화인들의 노력에 정치인들과 행정관료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영화를 문화와 예술로 이해하고, 영화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정치인과 행정관료가 있어야만 한다. 부산은 그런 협력으로 영화도시라는 브랜드를 얻었다. 아직 서울에는 그런 지원자들이 없는 듯하다.

독일 뒤셀도르프 영화박물관의 관장인 사비네 렝크는 “정치인들은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화의 찬란한 가치에 눈이 멀어 있고, 단지 관람객 수와 방명록에 남겨진 숫자에만 감명을 받는다. 그들은 영화를 위한 공간이 돈과 노력의 낭비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려 한다. 서울시가 이런 문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시간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시, 영화의 가치에 투자하라

셋째, 시네마테크에 대한 인식을 가진 진정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많아져야 한다. 프랑스를 제외하자면 전세계 시네마테크 관계자들 대부분은 영화의 문화와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기에 시네마테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부심은 이 작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소진한 지난 10여년의 시간에 간직되어 있다.

시네마테크의 진정한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관객 또한 그럴 것이다. 영화 애호가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못한 영화의 예외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최소한 동네 가게에 가서 백화점에나 있을 법한 물건을 찾으면서 그 부재를 탓하면서 불평하는 그런 사람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고다르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열린 ‘루이 뤼미에르 회고전’에 보낸 헌사를, 앙드레 바쟁이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시네마테크에서 본 뒤에 쓴 글을 잊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의 서울아트시네마보다 작았던 시네마테크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주위에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시네마테크의 친구인가?

 

 

(씨네21)인구 천만 서울에 전용관이 없다뇨!

올해로 5주년을 맞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맞이해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류승완 감독이 모였다. ‘늘 보는 얼굴들’이라며 서로 식상해하지만 이들만큼 그간 시네마테크에 애정을 쏟아온 감독들도 드물다. 이들은 자신의 추천작 얘기를 시작으로 시네마테크의 ‘지속 가능한 상영’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현재 박찬욱 감독이 대표로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은 서울아트시네마의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고 안정적인 공간 확보, 서울시의 예산 확보, 영화문화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비전을 꿈꾸며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영화인들과 함께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시네마테크 건립 추진위)’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월15일(금)에는 이들 외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이명세·최동훈·정윤철·윤제균 감독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과 안성기, 강수연 등의 배우가 참석한 가운데 추진위원회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올해로 5회를 맞는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이 열렸다. 이 친구들과 이들의 추천영화를 내년에도 만나고픈 마음, 간절하다.

# 전설의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네

박찬욱: 에릭 로메르 감독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오늘 들었는데 정말 충격이다. 정말 우리 시대의 대가들이 하나둘 빠른 속도로 떠나고 있다.

류승완: 얼마 전 영화비평가 로빈 우드도 세상을 떴고, 유독 지난해에 안타까운 죽음이 많았다.

봉준호: 며칠 전 우연히 에릭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1991)를 다시 봤는데, 그 다음날 부고 기사가 나서 깜짝 놀랐다.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향년 89살이라고 하니 그래도 호상 아닐까. 같은 영화감독으로서는 그처럼 오래 쉼없이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게 무척 부러운 일이다. 올해 우리가 선정한 영화의 감독들 중에서도 곧 떠나갈 분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 안타깝다.

김지운: 예전에 만났던 스즈키 세이준 감독도 영화감독의 제1 덕목은 건강이라고 했는데, 그분도 잘 계신지 궁금하다. 베리만, 안토니오니, 이마무라 쇼헤이 다 안타까운 죽음이었는데 정말 이제 몇분 남지 않았다. 진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봉준호: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은 100살이 넘어 신선처럼 사시는 분이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님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다. 그런데 신도 가네토 감독은 거의 100살 되셨는데 정정하시다고 하더라.

박찬욱: 겨울이라 나이 드신 감독님들은 특히 조심하셔야 한다. 빙판길 조심하고 목도리나 모자 꼭 하고. (웃음)

류승완: 감독님도 조심하세요. 괜히 돌아다니지 마시고요. 여름 멋쟁이는 쪄서 죽고 겨울 멋쟁이는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어요. (일동 웃음)

박찬욱: 그런 사람들을 경상도에서는 ‘깔롱쟁이’라고 부르더라. 전에 부산에서 <박쥐> 찍을 때 동네에 ‘깔롱쟁이’라는 조그만 옷가게가 있더라고. 송강호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며 엄청 웃더라고. ‘깔롱지긴다’고 하던데 약간 껄렁대는 멋쟁이라나. (웃음) 아무튼 시네마테크의 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전설의 감독님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위기라면 위기다.

# 다른 엔딩과 삽입곡의 <열혈남아>다

류승완: 이번 나의 추천작은 <열혈남아>인데 홍콩판으로 상영된다. 마지막에 유덕화가 거의 실성한 모습으로 살아남아 장만옥이 사온 귤을 잘 못 까고 하는 그런 장면이 빠져서 엔딩이 다르다. 삽입곡도 차이가 있고. 예전에 대만판으로 상영됐던 걸 사람들이 많이 기억할 텐데.

박찬욱: 왕가위 감독이 좋아하는 버전은 대만판 아닐까? 왠지 그걸 더 좋아할 거 같다.

김지운: 홍콩영화를 <영웅본색> 이후와 <열혈남아> 이후로 나눌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영웅본색> 이후 수많은 아류작들을 보면서 질렸고 한동안 홍콩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열혈남아>부터 다시 홍콩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류승완: 옛날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숏 바이 숏’으로 유덕화의 포장마차 습격신을 분석해놓은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형광등으로 확 내려치기까지. 그런데 잡지에서 4개의 유덕화 얼굴 클로즈업으로 기승전결을 나눈다고 했는데 그 클로즈업이 4번보다 더 많이 나왔었다. (웃음) 그리고 영화 포스터 느낌이 너무 좋았다. 장학우가 만자량 밑에서 총을 들이대고 있고 약간 푸른빛이 도는 가운데 유덕화의 클로즈업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그런 색감의 포스터가 처음이었다. 왕가위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열혈남아>이기도 하고.

봉준호: <열혈남아>는 정말 화질 나쁜 비디오로 봤던 기억이 난다.

박찬욱: 나도.

류승완: <열혈남아>는 잠실 호수극장에서 <영웅투혼>(1987)과 동시상영으로 봤다. <영웅투혼>은 주윤발과 등광영이 나온 영화인데 마구간에서 싸우는 장면이 일품이다. 그 장면에 반해서 각 영화를 2번씩 앉은 자리에서 총 4회를 봤다. 그러고 보니 <영웅투혼>은 왕가위가 <열혈남아>로 데뷔하기 직전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이기도 하다.

김지운: 호수극장에 계신 분이 왕가위 특별전으로 하신 건가? (일동 웃음)

박찬욱: 프로그래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엄청난 프로그래밍인데? (웃음)

류승완: 등광영은 그 인연으로 나중에 왕가위의 <아비정전>을 제작했다가 망한 사람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학교 땡땡이치고 <아비정전> 개봉 첫날 중앙극장에서 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진 대로 대량 환불 사태가 빚어졌던 전설의 영화다. 액션영화를 기대하고 온 아저씨들이 소란을 일으켰는데, 나중에 겨우 기차역에서 좀 싸우니까 “이 씨발놈들이 이제야 싸우네”, “이런 걸 영화라고 틀고 지랄이야” 하면서 정말 난리가 났다. 그 역사의 현장에 내가 있었다. (웃음)

박찬욱: 그런 영화 중에 <비정성시>도 있었다. 화양극장인가에서 봤는데 그때도 항의사태가 유명했다. 칼로 의자를 찢는 사람도 봤다. (웃음) 제목에서 홍콩 누아르 분위기도 나고 포스터도 마치 삼합회 장례식 같아 보이니까 그런 쪽으로 많이 기대를 했었지.

# 언젠가 한국영화들로만 추천작을 꼽아보자

류승완: 사실 이번에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이나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을 하고 싶었다. 아직 90년대라 하면 굉장히 현대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거의 20여년 전이다. 그래서 <게임의 법칙>을 프린트로 본 지금의 20대 관객이 없을 테니 박중훈, 이경영 같은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김지운: 듣고 보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언젠가 한국영화들로만 추천작을 꼽아서 해도 좋을 것 같다.

봉준호: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그리고 <파업전야> 전부 1990년 영화라 어느덧 20년 전 영화다. 그렇게 모아봐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들도 우리처럼>을 다시 보고 싶은데 형사로 나온 배우 유퉁의 짧고 굵은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눈 감아! 눈 감아!” 하는 연기는 정말 한국영화 최고의 취조신이었다.

류승완: <그들도 우리처럼>을 보면 조감독이자 단역으로 나와서 박중훈 선배의 스트레이트에 턱이 돌아가는 김성수 감독님을 볼 수 있죠. (웃음)

박찬욱: 나는 <경마장 가는 길>이 가장 보고 싶어.

봉준호: 나도 어려서 잠실에서 살아서 호수극장을 잘 안다. (웃음) <샤키 머신>(1981)을 거기서 봤는데 버트 레이놀스는 물론이고 레이첼 워드가 죽여줬다. 그리고 잠실에 엄마손 극장도 유명했다. 엄마손 백화점 안에 있었는데 좀 꿀꿀한 분위기였다.

류승완: 어, 나도 거기 아는데. 지하 식당가의 음식 냄새가 그대로 들어오는 극장이었다. 그리고 김청기 감독님이 운영하던 그랑프리 극장도 그 근처였다. 거기서 영화를 보면 김청기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O.S.T 카세트테이프를 줬다. 그래서 <바이오맨>도 거기서 봤던 것 같고. 또 나중에 잠실에 롯데월드가 지어지고 롯데시네마를 이두용 감독님이 운영하면서 자신의 영화 <흑설>(1990)을 장기 상영하셨다. 당시의 정두홍이라 할 수 있는 김춘식 선배가 액션을 맡은 영화였다. 그 밖에 신림동 미림극장도 생각나는데, 시네마테크의 위기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런 동네 극장들이 사라진 풍경도 좀 짠하다.

# 동네 극장들이 사라진 풍경도 좀 짠해

봉준호: 이번에 내가 추천한 작품은 바로 그 <샤키 머신>의 버트 레이놀스가 출연한 <서바이벌 게임>(1972)이다. 전에 KBS 명화극장에서 할 때 봤는데 동성애 장면들이 있어서 엄청나게 잘려서 방영됐다. CIC 비디오로 가지고 있었는데 <변질헤드> 찍을 때 참고하라고 승완이한테 그걸 준 기억이 난다. <변질헤드>가 주인공이 약수터 갔다가 괴물 같은 애들을 만나는 영화니까 숲 장면 연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류승완: 보통 비디오로 카피를 뜨면 스티커에 대충 사인펜으로 제목을 적고 하는데 봉준호 선배는 정말 정성스레 라벨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빈틈없이 딱딱 맞게.

봉준호: 그렇게 모아놓은 걸 다 갖다버렸으니 참 아깝다. 아무튼 난 1순위로 하고 싶었던 영화가 바로 <서바이벌 게임>이었고, 다행히 프린트가 수급돼서 바로 할 수 있게 됐다. 2순위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살의>(1964)였다.

박찬욱: 1천만 감독은 영화를 골라도 한번에 1순위로 바로 다 되는구나. (웃음)

류승완: 되는 놈은 자빠져도 처녀 치마폭으로 쓰러진다더니. (일동 웃음) 요즘 조기 축구하는 형님들 쫓아다니면서 대사 취재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공 몰고 가다가 공 뺏기면 “야, 장난치다 애 배는 거야” 그러고. (웃음)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진득한 대사들은 정말 따라갈 수가 없다.

김지운: 내 추천작 중에는 세르주 브르기뇽의 <시벨의 일요일>(1962),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1965),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1979) 같은 작품들이 있었는데 파졸리니의 <마태복음>(1964)이 됐다.

봉준호: 얼마 전 크라이테리언에서 나온 아녜스 바르다 박스 세트를 봤는데 <행복>도 그렇고 색감이 참 잘 나왔더라.

김지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마태복음>을 봤는데 파졸리니의 명성을 얘기로만 듣고 있다가 처음 접하게 된 작품이었다. 백수로 지내던 시절 1년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무작정 파리로 간 건데 정말 별천지 같았다. 1년 내내 파졸리니 영화만 상영하는 극장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파졸리니 그 자신만의 예수를 창조한 건데 유럽에 워낙 팬이 많을뿐더러 서양의 종교, 철학, 사상, 신학을 다 아우르는 그 솜씨를 보면서 당대 최고의 감독이 아닌가 했다. 정말 큰 충격을 준 작품이었다.

박찬욱: 나도 요즘 이탈리아영화에 애착이 많다. 그래서 처음 고른 영화가 국내에 <완전범죄>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됐던 영화인데,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범죄영화 <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1970)다. 내가 좋아하는 지안 마리아 블론테가 주인공이고. 비디오는 상태도 안 좋고 번역도 엉망이어서 다시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는데 사정상 안됐다. 그래서 선정한 영화가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1973)다. 4, 5년 전에 런던에 있을 때 재개봉을 해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러다 나중에 중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니콜라스 뢰그와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고. 비록 이탈리아영화는 아니지만 이탈리아 베니스가 나오기도 하니까. (웃음)

김지운: 그러고 보니 지금껏 친구들 영화제 하면서 고른 <퍼제션>(1981)이나 <그랜드 뷔페>(1973), 그리고 평소 좋아한다고 말하는 <테넌트>(1976) 같은 작품들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나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이 무척 유사한 것 같다.

박찬욱: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퍼제션>과 <쳐다보지 마라>는 내가 볼 수 있는 한계 내의 공포영화라 할 수 있다. 물론 도널드 서덜런드도 베니스에서 그런 촬영을 한 게 놀랍다. 보통 베니스는 관광객이 따뜻할 때 많이 가는데 겨울 베니스를 보여주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것 같았다.

김지운: 베니스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나는 비스콘티의 <베니스의 죽음>(1971)을 파리의 조그만 극장에서 봤는데 초반부에 뒤에서 누군가 문을 뻥 차더니 일군의 펑크족들이 들어왔다. 영화 보는 내내 장난치고 떠들고 계속 소란스러웠는데 나중에 조용해지더니, 끝나고 보니 다들 울고불고 코 풀고 난리가 났더라. 와, 여기는 펑크도 다르구나, 했다. (웃음)

# 공간의 안정적 확보는커녕 상황은 더 나빠졌다

박찬욱: 당장 급한 게 시네마테크 전용관 문제다. 지금 가장 안정적으로 잘 운영되는 게 부산 시네마테크인데 서울에는 아직 그런 시네마테크가 없다. 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데도.

류승완: 부산은 너무 좋다. 상암동 영상자료원쪽으로 함께 들어갈 수는 없는지. 고전의 복원과 나눔이라는 측면에서 시너지 효과도 나고 참 좋을 텐데.

김지운: 부산 시네마테크는 내년이나 내후년 부산영상센터가 지어지면 전용상영관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필름 수장고까지 생긴다니 마냥 부럽기만 하다. 나로서는 이런 시네마테크가 사라진다는 게 무척 절망적이다. 남들처럼 충무로 도제제도를 착실히 밟았다거나, 영화 관련 학교를 수료한 사람이 아니어서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시네마테크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네마테크 그 자체로서 많은 시네필들에게 학교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박찬욱: 옳은 얘기다. 시네마테크에서 만난 한편의 영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공간에 갈증을 느끼는 거다. 먼저 전용관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이명세 감독님이 해주시기로 하셨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일동 박수)

봉준호: 내 덕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보광동 사무실로 찾아가서 <마더> DVD를 드리고 <개그맨> DVD에 사인을 받으면서 물밑작업을 했다. (일동 웃음)

박찬욱: 중구에서 엄청난 예산을 들여 영화박물관은 물론 영화제작사 등이 입주할 수 있는 ‘시네마 콤플렉스’라는 걸 건립한다고도 했는데, 거기 들어가는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봉준호: 서울충무로영화제와 좀 불편한 동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방법이 될 것 같긴 하다. 하드웨어만 보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정도의 규모가 될 것 같은데, ‘오묘한 셋방살이’라도 뭐….

김지운: 기존 공간 중에서는 씨네큐브가 제일 좋아 보인다. 모든 게 완비돼 있으니까. 백두대간이 나가면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잘 얘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예전에 시사회 많이 했던 시청 근처의 씨넥스도 생각난다. 시설은 그대로인데 지금은 큰 회의를 하는 공간 정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서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북경반점> 같은 영화를 봤었다.

류승완: 자립 의지만큼이나 시나 정부의 지원이 중요하니까 유인촌 장관, 오세훈 시장과의 면담 자리를 갖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서울에서 해보자고 제안하는 거다. 충분히 수용할 만한 여건이나 저변이 되니까. 방문단을 조직해서 함께 직접 보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아무래도 관심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직접 눈으로 보고 그 가치를 느껴보는 것도 중요하다. 모두가 새롭고 다이내믹한 서울을 외치면서 왜 그런 변변한 시네마테크조차 하나 없는지….

봉준호: 내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장 프랑수아 로제를 잘 아니까 그쪽을 뚫어보고, 박찬욱 감독님은 <도끼> 작업을 하시면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원장이기도 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하고 잘 아실 테니 그쪽을 공략하면 뭔가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서 이만희 회고전을 할지도 모른다는데 그럴 때 함께 가는 것도 좋고.

류승완: 그럼 전 여행사를 알아보는 걸로 하죠. (일동 웃음) 프랑스로 가는 저렴한 항공권이 있는지.

김지운: 일단 공모제 문제가 먼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사실 여러 사업자를 대상으로 공모를 한다는 게 얼핏 민주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문제고. 그렇게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사업자를 공모하기로 결정하면서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도 이제 중앙시네마에서 공간을 뺐고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게 여기 서울아트시네마다.

류승완: 다음주쯤 공모 결과 발표가 나온다고 하는데, 다른 데서 갑자기 뭔가 급조해서 만들고 영화진흥위원회가 거길 지목하면 그렇게 돼버리는 건데 참 안타깝다. 이미 잡아놓은 프로그램들은 다 어떻게 되는지도 막막하고. 이렇게 폐업 단계로까지 가면 안되는데.

박찬욱: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맨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아트선재센터에서 쫓겨나면서였는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났는데도 공간의 안정적 확보는커녕 상황은 더 나빠졌다. 10년 채우기도 힘들다.

# 신작 준비는 잘되고 있는가

박찬욱: 이제 우리 각자의 계획을 얘기하면서 마무리하자. 그나저나 다들 <아바타>는 봤나? 나는 못 봤다.

봉준호: 아직 못 봤다.

김지운: 나도 못 봤다. 보고는 싶은데.

류승완: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하고 봤다. 아이맥스 티켓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아이맥스 효과라도 얻으려고 3D 상영관의 세 번째 줄에 앉아서 봤다. 와이프도 그렇고 너무 좋아하던데 나는 사실 좀 잤다. (웃음) 현재는 열심히 <부당거래>를 준비하고 있고 3월경 크랭크인이 목표다. 승범이랑 같이 하는데 제목이 너무 동글동글하다고 웃기다고 하더라.

봉준호: <설국열차>는 내년 3월 크랭크인이 목표다. 저기 제작자(박찬욱)도 계시는데(웃음), 지금 열심히 쓰고 있는 중이다.

김지운: 현재 준비 중인 <아열대의 밤>은 제목을 <악마를 보았다>로 바꿨다. 그게 좀더 세 보이면서 좀더 상업적인 냄새도 나고. 최민식 선배의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걸 느끼고 있다.

박찬욱: <도끼>는 아직 완전히 계약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다. 양쪽에서 계속 검토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우리 영화도 시네마테크도 올 한해 잘 해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대한민국 공화국 변천사

공화국은 헌법개정이 아니라 헌법상 대통령제인가 아니면 내각제인가 또는 대통령제라도 대통령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1공화국에서 2번의 개헌이 있었고 3차개헌에 의하여 내각제(2공화국), 2공화국 시절 1번의 개헌 5차개헌에 의하여 대통령제(3공화국), 3공화국 시절 1번의 개헌이 있었고 7차개헌에 의하여 유신정권(4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개정에 따라 공화국 명칭을 붙인다고 하면 어패가 있다.

 

- 1공화국 순수한 미국식 대통령제. 3권분립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체제이며 이 당시에 2번의 개헌(발췌,4사5입)이 있었다.
- 2공화국 내각제(국무총리가 내각수반).  4.19 이후 대통령제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독재를 피하기 위하여 내각제를 선택했다고 보면 됨.이 시기에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인물등을 처벌하기 위한 별도의 헌법개정이 있었다.

- 3공화국 대통령제로 환원. 5.16 이후 박정희에 의한 대통령제로 이 시기에 또 박통의 3선을 위한 3선개헌이 있었다.
- 4공화국 영도적 대통령제. 대통령제이면서 대통령이 입법,사법부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는 대통령제로 유신헌법하의 대통령
- 5공화국 우월한 위치의 대통령제. 유신헌법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강력한 힘을 보유했던 대통령제. 전두환시절
- 6공화국 대통령제. 3권이 균등한 힘을 가지는 대통령제

제 6공화국 이후에 공화국이 변천하지 않는 이유는  개헌시 공화국의 명칭이 바뀌는게 원칙인데 마지막 개헌이 노태우대통령때였고 지금까지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금은 제 6공화국인 것이다.

 

제1공화국 이승만대통령(1~3대) 1948-1960
제2공화국 윤보선대통령(4대) 1960-1962
제3공화국 박정희대통령(5~9대) 1963-1979
제4공화국 최규하대통령(10대) 1979-1980
제5공화국 전두환대통령(11~12대) 1981-1988
제6공화국 노태우대통령(13대) 1988-1993
                김영삼대통령(14대) 1993-1998
                김대중대통령(15대) 1998-2003
                노무현대통령(16대) 2003-2008

                이명박대통령(17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