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4일 금요일

그리하겠다며

세상이 이리도 변하고 사람들도 그리도 변하고 있는데 나만 코끼리 코 돌기 하고 있을 순 없지 않냐며

이천십년 쌍코피 줄줄 세상은 넓다 프로젝트로 후회없이 살고

그래도 안되면 정말 내년에는 모든 외로움을 감수하고 외쿡으로 떠나버리겠다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어서라도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겠다며

어흫흫 아자자

아 정말 난 모세혈관까지 대한민국 체질인데ㅜㅜ

시발스러워

새벽까지 쪽잠을 자며 한마리라도 더 닭을 팔려는 세 아이의 어머니

그녀의 손과 얼굴이 거칠어질수록, 빨갛게 눈이 충혈될 수록 어째 빚만 더 늘어날 뿐이다.

그놈의 삽질이 퍼 담을 줄도 좀 알면 좋으련만

역행하는 세상 속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참으로 허망하게 느껴져 잠이 안온다

아 정말 시발스럽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감독 박광수│출연 문성근, 홍경인, 김선재

 

아름답다.

더러운 시대의 꽃이여

 

2009년 12월 3일 목요일

<한홍구>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

요즈음 신문을 보면 혹시 시계가 10년쯤 거꾸로 돌아가 1994년 여름의 주사파 소동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중앙일보>는 김일성방송대학이 이미 5년 전에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것을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북 주체사상 인터넷 공습’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11월11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이에 뒤질세라 다음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70여일 전에 조합원들을 상대로 개최한 공무원노동자학교 교육 내용에 주체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들어 공무원노조의 조합원 교육에 주체사상이 포함되었다며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5년 전에 시작한 인터넷 강의도, 70여일 전에 100명도 안 되는 조합원 모아놓고 행한 교육 내용도 대한민국의 일등신문 자리를 놓고 피말리는 경쟁을 하는 두 거대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올려놓다니, 참으로 놀라워라, 주체사상의 괴력이여!

박홍, 해프닝의 추억!

10년 전, 북의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조문 파동이 벌어지더니, 곧이어 주사파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당국은 일부 대학에 설치된 김일성 주석 분향소를 철거하고 학생들을 구속했다. 이 일로 이른바 ‘북핵 위기’를 지나 정상회담 일보 직전까지 갔던 남북 관계는 김영삼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에 한명의 스타가 다시 등장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출신에 서강대 총장으로 있던 신부 박홍,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당시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여 전대미문의 ‘유서대필’ 사건을 초래한 바로 그 인물이 다시 험한 입을 열었다.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 돌아온 것이다.

박홍은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초청 오찬에서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되어 있다면서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얼마 뒤 그는 “북한에 초청되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남한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발언을 했고, 몇몇 교수들은 공안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홍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연일 주사파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박홍의 입을 쳐다보기는 언론만이 아니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을 꼭 극장에 가야 볼 수 있지는 않았다. 마치 박홍이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인 듯 그의 말 한마디에 주사파 사냥의 화살은 과녁을 옮겨다녔다.

제자인 학생들을 주사파로 고발한 ‘스승’은 <조선일보>에 의해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 신문은 한 면을 털어 사회가 그의 용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각계 ‘지식인’들의 동조발언을 실었다. 그런데 이 용기 있는 신부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연일 쏟아내는 놀라운 주장들의 ‘증거’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박홍은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조선일보>의 한 논객은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박홍의 발언을 놓고 “일부의 인사는 증거를 대라고 추궁”하는데 “증거 요구는 망발”이며 “천치가 아닌 한 누구도 물증을 고스란히 모두 남겨놓으면서 혁명운동을 꾸미지는 않는다”고까지 주장했다.

주사파의 뒤에는 사노맹이 있다는 말에 가장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아마도 사노맹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90년 안기부에 의해 일제 검거된 사노맹은 남쪽의 운동 진영에서 친북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사파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반대하는 그룹으로서 주사파들과 첨예한 사상투쟁을 전개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정통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북이나 주체사상을 사회주의를 벗어난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편향이라고 비난해왔다. 그냥 비난해온 정도가 아니라 남쪽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주사파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집단이 사노맹이었다.

 

사노맹은 억울하다?

그런데 졸지에 사노맹이란 이름이 북의 청년단체인 사로청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이 혐오하는 주사파의 배후이자, 사로청의 지시를 받는, 말하자면 남쪽의 주사파를 북과 연결해주는 고리로 지목되었으니 그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노맹이 주사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점은 민족민주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명칭이 비슷하다고 이렇게 연결지어 놓은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조선일보>의 평가가 100% 잘못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만큼은 확실했다. 애들 잘 쓰는 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더라만….

남쪽에 주체사상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85년 말부터이다. 일부 학생들이 북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방송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북의 주체사상을 방송을 통해 받아들이기까지 남쪽의 민족민주운동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1970년대 후반에는 남미의 상황을 설명하는 종속이론이 수입되어 꽤나 유행했다. 그러나 머나먼 남미의 종속이론은 아무래도 우리 처지와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웃한 중국혁명의 경험에서 마오쩌둥의 사상과 혁명이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마오의 이론은 다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통이론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레닌에 이어 사람들은 스탈린을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원전(原典)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원전 속에 저 광주의 학살자를 몰아내는, 모순에 찬 자본주의를 일거에 해결하는 비법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몇번씩 복사해서 글자가 뭉개진 책을 몰래 돌려보았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타자를 쳐서 복사한 아주 조잡하게 번역된 원전들의 한국어판이 돌기 시작했다.

원전의 공부도, 사회과학 공부도 역사가 길지 않았다. 현대사 연구는 광주를 거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놀라운 학구열과 첨예한 의식을 가진 어린 학생들, 그러나 복잡한 세상은 희미한 원전 복사본에 사회과학 서적 몇권 읽은 지식으로 분석하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누가 해주지 않는 작업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 사회 내부의 계급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과의 문제 또는 북과의 통일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가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채 소화되지 않은 이론과 지식으로 얽히고설킨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니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말도 글도 너무 어려워졌다. 글 쓴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는데,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사람들은 생경한 사회분석을 그대로 조직론과 실천론에 적용하고 그것을 과학이라 믿었다. 논쟁 판에는 이미 머리에 쥐가 난 사람들과 곧 나려는 사람들 두 부류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속이론을 지나 레닌을 건너…

주체사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주체사상이 남쪽에서 일거에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우선 쉬웠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사회구성체 논쟁에 질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단순명쾌하게 풀어버리는 주체사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든 것은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약어)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의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번잡할 대로 번잡해진 사회구성체 논쟁과는 달리 이제 ‘고민 끝, 실천 시작’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서구의 신좌파에서 남미의 종속이론을 거쳐 중국의 마오이즘을 지나 마르크스를 만나고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볼셰비즘으로의 긴 여정 끝에 사람들은 마침내 원산지가 조선임을 주장하는 주체사상을 만난 것이다. 이제 번역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번역의 시대가 종식되었다는 것이 곧 남쪽 운동 진영이 정말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기 얘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번역의 시대보다 더 어두운 ‘받아쓰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받아쓰기의 시대는 화려하게 개막되었다. ‘강철’이란 서명에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은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널리 퍼져갔다. ‘강철서신’은 마치 무협지에서 새로운 고수가 강호를 평정하듯 새로운 신화를 낳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활동가의 품성을 강조했다. 이론만이 남아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던 당시의 풍토에서 사람냄새 물씬 나는 품성에 대한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철서신’에서 미국은 미국놈도, 미제도 아니었다. ‘노린내 나는 양키’였고, 각을 떠도 시원찮을 존재였다.

나는 이 무렵 스칼라피노,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번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주요 연설문을 비롯하여 북에서 나온 각종 서적이나 문헌들을 이미 많이 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강철서신’의 출현은 북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펴는 집단이 남쪽의 운동 진영 내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내게는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북의 원전을 이미 본 입장에서 볼 때 강철의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북의 원전을 접할 길이 없었던 일반 청년학생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강철 김영환은 사상의 불모지였던 남쪽에 주체사상을 꽃피운 자생적 주체주의자로 추앙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쪽의 운동 진영을 위해서도, 김영환 본인을 위해서도, 주체사상을 위해서도 크나큰 불행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김영환의 착각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1999년, 김영환은 강철이 아니라 간첩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밀입북하여 김일성까지 만난 남쪽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 이전의 조직 사건에서 조작과 침소봉대라는 의혹을 받던 국정원은 이 사건의 경우 축소 수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김영환을 공소 보류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강철 김영환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반성문을 국정원에서 작성했고, <조선일보>는 주사파 대부의 반성문을 특종 보도했다.

이 무렵 김영환이 <신동아>와 한 인터뷰를 보면 기가 막히도록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김일성을 직접 만난 김영환의 평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가 만나서 얘기해본 바에 의하면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만 꺼냈지 실제로 김일성이 하는 얘기에는 주체사상의 내용이 녹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혀 없었어요.” 얼치기 신학생이 예수님 만나 몇 마디 대화 나누고 ‘기독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라고 얘기하는 것과 한가지이다. 앞뒤가 꽉 막힌 유생이 <논어> 달달 외고 공자님 만나 문답을 하다가 사람을 보아가며 똑같은 이치를 다르게 설명해주는 공자님보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모른다고 비판하는 격이다.

김영환은 자신이 밑줄 그어가며 달달 외운 주체사상 해설서나 논문을 생각하며, 김일성이 주체사상에 대해 모른다고 용감하게 말한 것이다. 김영환이 공부한 주체사상은 황장엽 등이 당의정을 입힌 주체사상이다. 자주성이니, 창조성이니, 의식성이니 하는 용어들이 그런 당의정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약을 보고 당의정만 기억해서 노란 약, 주황색 약 등등 색깔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색깔은 약의 본질과는 전혀 다르다. 황장엽 등 이론가의 역할은 약에 당의정을 입히고, 포장을 하고, 설명서를 단 것이지, 약을 만든 것이 아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잘못 알려진 황장엽의 역할은 당의정 입힌 정도로 수정되어야 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주체사상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의 건설 과정에서 교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북에서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사상 체계로 너무 뻥튀기하지 않고 하나의 삶의 태도로 설명했더라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버렸다. 강철 시절의 김영환에게 북은 남의 대안이자 ‘절대선’이었다. 항일 무장투쟁의 신화와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건설! 일제의 강점과 분단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요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노린내 나는 양키의 군홧발 아래” 짓밟힌 남녘에서 자란 세대에게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북은 이상향처럼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이라면 남쪽이 북에 비해 경제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그 격차가 오늘날처럼 비교할 수 없게 벌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현실정치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체제인 북을 ‘절대선’으로 본 것도 비극이지만, 김영환은 이런 잘못을 깨닫고는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수구세력의 품에 안긴 채로…. 그가 쓴 ‘강철서신’의 히트작 ‘간첩 박헌영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고 자란 세대는 “간첩 김영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주사파(注射派) 소동은 계속된다

남쪽이 민주화가 되고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마당에서 아직도 주사파 소동은 벌어지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사파도 한 가지 브랜드가 아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북의 체제 우위를 주장하는 주사파(主思派)는 이제 거의 멸종위기이다. 그런데도 주사파가 나타났다고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또 다른 주사파(酒邪派)로 분류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술 마시고 어쩌다 주사 부리는 것이라면 한숨 쉬며 참아줄 수 있겠다. 그런데 술 취하지도 않고 아무나 보고 주사파, 주사파 하고 주사를 부리니 참 더불어 살기 고약한 존재들이다. 더 악질적인 주사파는 주사(注射)를 맞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속된 말로 뽕쟁이라 하는 주사파(注射派)들이다. 제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무언가가 주입되어야만 움직이는 족속들, 약기운이 떨어지면 심한 금단현상을 보이는 부류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더니 주사파(主思派)와 주사파(酒邪派)가 만나 새로운 주사파(注射派)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겨레21>

<한홍구> 뉴라이트는 '품성'을 갖춰라

광주의 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대학가는 수백명의 동포를 학살한 자가 대통령으로 거들먹거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학생들은 학살의 원흉을 끌어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종속이론에서부터 일본의 강단 마르크시스트들이 쓴 여러 가지 책이며, 마오쩌뚱의 사상이며, 레닌의 이론이며, 스탈린의 교과서까지…. 그리고 주체사상마저 들어왔다.


사실 이런 이론들은 입시 준비에 찌들어 변변한 인문교양서를 읽을 틈도 없이 사춘기를 보낸 대학생들에게는, 전문가인 교수들이 강의실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충분히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공군사 독재 아래서, 학보에 실을 원고에 ‘계급’이란 말만 써도 모조리 ‘계층’으로 고쳐놓는 교수님이 계신 대학가에서 이런 수입 혁명이론들은 정상적인 유통경로를 거칠 수 없었다. 이른바 386 세대의 학생들은 1년 전에는 똑같이 아무것도 몰랐던 선배가 거칠게 한두번 씹어준 이론을 자취방에서 벌어진 세미나에서 받아먹었다. 그런 소화되지 못한 이론조차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70년대 세대들은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눈빛이 달라진 후배들이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론으로 무장하는 것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경외감이나 어쩌면 부러움을 갖고 바라보았다.


1980년대는 사상의 시대였다. 그러나 미숙한 시대였다. 모두들 사상이, 세계관이, 철학적 입장이 중요하다고 거품을 물었지만, 정작 사상의 내용은 채우지 못한 그런 시대였다. 그래도 사상은 중요했다. 저 강력한 군사독재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면 사상적 준비가 필요했고, 대열의 사상적 통일과 단결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실무적인 일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에서도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사상적 입장이나 세계관이 달라서 그렇다며, 몇달씩 변증법적 유물론을 공부하자고 계획을 잡는 것도 별로 낯선 일이 아니었다. 뭐든지 변증법을 끌어다가 설명하려 들던 그 시절에 변증법, 참 여러 군데서 고생 많았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사상투쟁이나 사상운동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던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 그 시절 사투(사상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머리로든 발로든 운동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정말 오랜만에 사상운동이란 말을 다시 들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말을 다시 살려낸 사람들은 이른바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나선 이들. 수구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그들은 “노무현 정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사상을 생산하고 확대하는 ‘사상운동’이 필요하고도 긴급”하다며, “사회 곳곳에 자유주의 진지를 구축하고 자유주의를 시대담론으로 만드는 사상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뉴 라이트 운동 관계자들은 이 운동이 현실정치와 어떤 관련을 맺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사상운동이 성공하면 현실정치에 참여할 시점이 올 수도 있다”고 답했다. 20대 시절, 눈 동그랗게 뜨고 사상투쟁 하자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나이 40이 넘어서도 역시 눈 부릅뜨고 사상투쟁 하자고 하는 것이다.


뉴 라이트가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새롭기에 이름에다 ‘뉴’를 달고 나왔을까?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비판해대는 ‘수구 보수’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저 유명한 김용갑 의원이 “뉴 라이트의 주장이 바로 내 주장”이라고 반색을 하고 나올 정도로 뉴 라이트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두드러진 차이는 하나,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나선 ‘자유주의연대’라는 단체의 주요 간부들이 이른바 386 운동권, 그것도 말 많고 탈 많은 주사파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제 그들이 40대가 되어 자신들은 더 이상 운동권 386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자유주의 486’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10년간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골방에서 열심히 10년간 연구개발해서 들고 나온 모델이 486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 세상은 펜티엄급도 머잖아 낡은 모델이 될 정도로 확확 변하고 있는데.


이들 486을 불러낸 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이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 칼럼은 “‘주사파 386’의 약점과 정체를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들의 천적(天敵)”인 ‘자유주의 486’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물으면 ‘색깔론’이라고 길길이 뛰면서도 남을 향해서는 걸핏하면 ‘보수꼴통’ ‘수구냉전’이라며 ‘역(逆) 색깔론’을 펴는 ‘주사파 386’들의 아킬레스건에 ‘예리한 비수를 던져야 한다”는 격문을 썼다. 이 격문은 “전함 12척은 분명히 남아 있다”라는 결연한 말로 끝을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해직된 사이, 134척의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되어 겨우 12척의 배만 남았다.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 그는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있고 미천한 신도 죽지 않았습니다”(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을 인용한 이 글은 1980년대 뉴 라이트 중심인물들이 주사파로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 국책연구기관의 어느 교수가 자못 비장하게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격문을 날린 이래, 그 동네 최고의 명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수구의 항구에 가보니 배야 12척이 아니라 100척도 넘게 남아 있다. 문제는 배가 없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이 없다. 아니, 이순신을 만들어낸 민중의 아픔과 희망이 수구의 진영에는 처음부터 없었다.


무엇보다 뉴 라이트들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극단적이다. 1980년대에는 너무 쉽게 사회주의자가 되고 너무 쉽게 주사파가 되었다면, 지금은 너무 쉽게 뉴 라이트가 되었다. 사실 이들이 주체사상을 들고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주체사상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였다. 당시 운동 진영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북을 때려잡아야 할 ‘북괴’가 아니라 함께 통일을 이루어야 할 민족의 절반으로, 새롭게 사귀어야 할 친구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뉴 라이트들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들에게 북은 새롭게 사귀어야 할 벗도, 오랫동안 갈라졌던 형제도 아니었다. 뉴 라이트들이 핵심을 이룬 주사파들은 북을 이남의 혁명까지 지도해야 할 지도부로 섬겼다. 그들은 수령론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며, 민족자주와 통일의 과제를 폭넓게 끌어안는 집단 내에서 사상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수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이 참된 운동가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들이댔다. 그리고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생신’이 오면 탄신을 ‘경하’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가서, 너무 조급하고 교조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하는 짓은 똑같다. 나이로는 불혹의 40대에 접어들었고, 사상적으로는 전향을 했다지만, 하는 짓은 똑같다. 다만 그때는 왼쪽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지금은 오른쪽으로 치달아 놀라게 하고 있다. 그 시절 운동 진영에서 잘 쓰던 말에 ‘소아병’이란 말이 있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극단적인 언행만 일삼는 미성숙한 태도를 야유하는 말이다. 주입식 교육에 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던 20대 시절에 이 돌림병에 걸리는 것은 어쩌면 통과의례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나이에 책임을 져야 할 40대에 이르러서도 그 병을 앓고 있다니 참 딱한 노릇이다.


새 모자를 갈아쓰고 새 장갑을 갈아끼듯, 그들은 주체사상을 버리고 자유주의를 선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사상을 중시해서, 삐꺽하면 사상투쟁을 벌이고 사상운동을 하자는 자들이 사상을 부속품 갈아끼듯 바꿔치기하는 모습은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상의 숙성과 내면화를 거치지 않고 이렇게 부속품을 갈아끼우듯 하는 것이야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일는지 모르지만, 제발 그런 걸 전향이라고 남들에게까지 강요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북을 수령으로 떠받들며 북의 방송을 받아쓰기-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받아쓰기, 맞춤법 엄청 틀렸다- 해서 열심히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더니만,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옛날에 주사파로 활약해서 잘 아는데 과거 학생 운동권의 다수는 주사파였고, 요즘 정권에 진출한 386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떠들고 있다. 즉, 자기네가 열심히 만들어 뿌려댄 유인물을 받아 읽은 사람들을 지금 주사파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미친 X 널 뛰듯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힘껏 내달려가 과거에 알던 누군가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전향이 아니란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한번의 큰 좌절을 겪었을 텐데,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독선적인 태도와 승리에 대한 확신만큼은 변함없이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 동네에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는 금지곡임에 틀림없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기에 “우리는 진실과 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한다”고 마구 떠들어댈까? 그들이 20대일 때는 마치 거짓과 반지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좌절했다는 것일까? 공안기관의 밀실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전향에서 우리는 깊은 반성과 좌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한쪽으로 돌진하다가 쾅 머리를 들이박고는 “이쪽이 아닌가벼” 하며 또 반대쪽으로 달려간다. 더 빨리 달려간다. 그러면서 자신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아온 386 세대들은 “속성 재배로 인한 심각한 지적 빈곤”에 빠져 있으며, “386 자신을 선이며 도덕적 가치로 확신하는 황당함”은 바로 이런 속성 재배와 지적 빈곤의 산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거의 386들에게 이런 속성이 있었다면, 그런 특징을 가장 많이 가진 부류는 주사파였고, 주사파 내에서도 바로 그들이었다. 20년 세월이 흘러 아직도 그런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뉴 라이트들이다. 그들과 함께 운동을 했던 한 사람은 자신이 오히려 “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냐고 그들에게 따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뉴 라이트를 자처하는 주사파들의 변치 않은 점은 언제나 자기들이 각광을 받으며 무엇인가가 되고자 했다는 점이다. 단 한번도 노동의 땀방울로 밥을 벌어먹은 적이 없는 처지에 노동운동을 지도하겠다고 나서고, 노동운동가를 자처하며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문건을 만들어 배포하고, ‘사상적 지도자’인 자신들은 공장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지도’를 받는 동료와 후배들을 서슴없이 공장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 시대의 사상적 지도자를 자처하며 일대 사상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선다. 1980년대는 전두환 같은 자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에, 단 한번도 제 몸을 놀려 노동의 의미를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자들이 노동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실제 노동운동을 하던 일부 활동가들도 그들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런 시대였다. 그들이 한때나마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살인마 전두환이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사람들, 갈라진 조국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었던 활동가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뉴 라이트 뒤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다. 오로지 두 차례의 대선 패배로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감에 휩싸인 수구만이 있을 뿐이다.


뉴 라이트가 각광을 받는 꼴을 보면서 서글퍼지는 것은 그들이 딱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설치는 바람에 진짜 합리적인 보수세력의 출현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뒤 얼마 되지 않았던 2001년 여름에 나는 진작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은 똥과 된장만큼 차이가 난다며, 보수세력 스스로 수구와 결별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2001년 8월8일자, 제371호) 또 지난 탄핵 사태 때도 혼자서 “돌격 앞으로!” 하고 뛰쳐나갔다가 고립돼버린 수구세력을 분리 수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구세력은 분리 수거되지 않았다. 대신 뉴 라이트라는 새 피를 수혈받았는데, 이들 뉴 라이트는 자유주의라는 장식품만 들고 나왔을 뿐 그 행각은 수구세력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수구세력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는 뉴 라이트 같은 부류가 설쳐대며 물을 흐려놓을수록 한국 사회의 진로에 대해 진짜 보수적인 대안을 제시할 만한 합리적이고 차분한 집단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을 하는 김용한 박사의 ‘침 뱉기’ 비유를 빌리면 뉴 라이트는 여러 명이 같이 먹으려고 마련한 큰 비빔밥 그릇에 침 뱉는 짓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침을 뱉으면 보통 사람들은 더러워서 숟가락을 놓을 수밖에 없고, 결국 비빔밥은 침 뱉은 놈이나 침 뱉은 밥도 먹을 수 있는 막강한 비위를 가진 자들만의 몫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뉴 라이트마냥 남의 등에 칼을 꽂아야 행동하는 보수 지성으로 찬양을 받는 세상이니, 등 뒤에 칼 꽂는 짓 대신 정책과 대안으로 승부를 해보려는 차분한 보수 지식인들이야 어디에 설 수 있을까?


뉴 라이트나 나나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고,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할 수 있다. 젊은 독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나이 타령을 좀 해야겠다. 본격적으로 나이 먹어가기 시작하니까 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좀 달라지는 것이 감지된다. 80년대의 질풍노도 시대를 살아온 나 역시 한때 이념과 사상을 중시했다. 광주에 대한 태도, 미국에 대한 입장,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했다. 뉴 라이트들마냥 ‘위수동’ ‘친지동’ 탄신을 챙기는 짓은 안 했어도, 북에 대한 입장은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별로 나이 많지도 않은 40대에 들어서도 운동의 현장에 남아서 작은 일이라도 거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살아오면서, 또 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아니면 그놈의 정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상이나 이념, 너무 절대화하지 말자. 어디 전태일이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일까?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희한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뉴 라이트를 보면서 자꾸 드는 생각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이 결코 이념 때문에 벌어진 논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대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 40을 넘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다. 좌파 중에도 절대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생각은 보수적이지만 도저한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우파도 있다. 자신들이야말로 지금도 진짜 주체사상파라고 우기는 뉴 라이트들을 위해 주체사상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품성’이 중요한 것이다. 뉴 라이트들이 옛 동료들을 향해 사상 고백을 하라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뉴 라이트 문제,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사상식으로 얘기하면 품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일상의 말로 바꾼다면 ‘싸가지’ 문제일 뿐이다.

<한겨레21>

2009년 12월 2일 수요일

잉여잉여잉여

잉여게이지 폭발

하루만에 미드를 시즌 세개나 클리어하고 현관문 밖으로 1초도 안나간지 약 40시간째임

간지나는ㅜㅜ2010년 재수생모드를 위한 잉여게이지마저 차고 넘친다-_-

어제 채널 파도타기에서 올리브티비의 클로저가 걸려 의식적으로 돌려버렸는데 결국 오늘 파토타기에 걸린 XTM의 클로저는 다봤다. 주드로와 나탈리포트만의 대사는 돌돌이도 외울 지경인데 또 봤다. 카우치포테이토의 결말은 비극이다.. 내일은 CGV의 클로저를 보고 있을지도..

내일부터 이번주 주말까지는 알람에 맞춰 눈뜨고 바로 머리 감고 집을 벗어나는 바이오리듬을 구축하고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부할꺼닷

최측근들과의 망년회와 메리크리스마스 밀월여행을 위해 12월초는 도서관과 영상자료원에 반납하겠스므이다. 일단 오늘부터 라천을 끊고 자정전에 잠을 들자

잉여탈출!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바람(2009)

 

감독 이성한│출연 정우, 양기원, 손호준, 권재현

 

나는 영화가 좋다. 그래서 매일 영화를 본다.

오늘은 미장센을, 네러티브를, 영상 미를, 감독의 의도를 머리 깨지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내가 2차 시험에다 써놓은 순박한 답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김정국(정우의 본명)의 자전적 이야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누군가의 혹평에 난 반기를 들고 싶다. 사람들 저마다에게 수천가지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전문가들의 개인적인 평과 느낌으로 세뇌시키려는 듯한 단호한 평론으로 획일화 시키는 건 말도 안된다.

모든 것에는 여지라는 것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바람>은 동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써 매우 즐거운 영화였고 정우라는 배우의 매력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