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전우치(2009)

 

감독 최동훈│출연 강동원, 김윤석, 임수정, 유해진, 백윤식, 염정아

 

최동훈감독 스타일 매니아는 아니지만 전작들에 못 미친건 사실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재미있지 않았다. 영화보면서 딱 두번 웃었다. 유해진이 개 흉내낼 때..

영화가 재미만 추구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면, 새로울 것도 하나도 없었고 여배우들의 캐스팅마저 그저 그랬다. (별 캐릭터 없이 내조의 여왕 이후 남발되는)선우선이 등장해서 앗차 싶었는데 임수정은 그냥 역할자체도 밍숭밍숭하고 어울리지마저 않았다. 게다가 염정아의 극과도 오버연기는 그렇게 오버가 필요할 정도로 코믹한 분위기가 아닌데 이게 왠일인가 싶어 오글거려 죽을 뻔..

극을 이끌어나가는 중심 내용이 전우치의 철없음도 아니고, 두사부일체 정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한 사랑도 아닌게 돼버려 '그저 136분짜리 강동원 매력발산의 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께서 "전우치 봤어요? 와 이거 정말 너무 재밌는데" 라며 대화를 시도하시길래 "아 네.. 뭐 강동원이 연기는 잘하더.."까지 응답했을때 딱 말을 짜르시더니 "정말 이거 이런 한국영화를 많이 만들어야 돼. 남자가 봐도 멋있는데 여자들이 얼마나 좋았겠어. 강동원 말이야. 다들 강동원 볼라고 오는 거 아냐. 잘생겼지 돈많지 날씬하지 이건 뭐 blablabla.."

 

아 그래. 무슨 팬픽 무비처럼 강동원 볼라고 오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감독은 그런걸 원해서 만든게 아닌들, 나는 절대 그렇게 영화를 보러 다니지는 않은들.

암튼 요즘 트랜드 좇다가 가랑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주인공의 외모 빼고는 도라에몽 극장판이 훨씬 우월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평을 남기고 싶음)

 

2009년 12월 27일 일요일

8Mile(2002)

 

감독 커티스 핸슨│출연 에미넴, 킴 베신저, 브리트니 머피, 메키 피퍼

 

강호동과 이수근의 말도 안되는 랩배틀을 보다가 말도 안되게 8mile이 보고 싶어졌다.

신입생 때 화양리를 뒤덮었던 에미넴의 lose yourself 열풍이 갑자기 금단현상처럼 확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항상 무언가 조금씩 안타깝지만

이제는 브리트니 머피의 백치미를 그리워해야만 한다는 것도 안타깝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앤딩의 폭발은 최고다.

 

축 제26회 크리스마스

 

(부산행이 불발된ㅜ_ㅜ) 제26회 크리쓰마쓰 행사를 위해 눈보라를 뚫고 매우 늦은 밤 역삼으로 출동. 국민 대 이동이라도 한 듯 텅빈 1호선과 2호선에서 약간 무서움을 느꼈다.. 나빼고 모두 10시 퇴근이라 내가 장을 보고 있을까라고 제의를 했지만 "너무 무거워(너에게 장보기를 맡기기엔 불안하다. 너는 이마트를 통째로 털어올지도 몰라)"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는데 혜라이의 전승현님은 손자명 노는데 가서 장봐오라고 하라며 고맙게도 내 마음을 읽어주셨다. 아 완전 2012년에 혼자 살아남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쨌든 혜라이와 이마트로 출동하여 전세계 맥주를 다 사들고 뭔노무 버스가 밤 10시에 끊겨서 택시를 타고 교대 14번 출구로 흐꼼을 픽업하러 가면서 네네의 치즈맛 스윙치킨과 케잌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하다가(둘 다 사자고 조용히 의견을 피력한 거 빼고는 오늘은 장보는데 매우 협조적이었다는 후기를 남기고 싶다) 흐꼼을 마구 도발시켜 아슈크림케잌은 싫다는 혜라이의 의견은 박살낸채 써리원에서 아슈크림케잌 구매를 강요했다ㅎㅎ 그리고 나를 위해 크리스마스모자도 곱게 모셔왔다ㅎㅎ  

으쌰으쌰 달려 주인장들의 불찰로 특실에서 하향조정된 우리의 일반룸에 ㅠㅜㅜ 도착!! 하자마자 케잌옵션 모자를 썼는데.. 이거슨 산다라박도 아니고 박봄 모자니까 너도 문제 없을꺼야 라던 흐꼼의 예상과 달리 내 두피를 벗겨내서 만든 듯 너무도 딱 맞아 곤란하고 더웠다..

 

  하지만 벗으면 지는거다.

항상 트렌드의 궤도를 놓치지 않는 흐꼼에게 2PM을 배우고 한 대여섯명쯤 걱정해주고 나니 전 세계 맥주들과 와인 두 병이 다 내 뱃속에 들어와버렸어요. 우영이가 우엉이로 들릴 때 쯤 흐꼼의 제1차 넉다운.

혜라이랑 대한민국의 26세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심층토론을 5시 38분까지 하다가 스믈스멀 잠이 들었다.

 

 

12시 30분 모닝콜에 심장마비 일으킬 뻔하게 깨어나 여유롭게 컵라면 브런치를 하며 신동엽의 300을 보는데 집에 있으면 머리도 안감고 세수도 안한다는 약 200 여명의 여성들에 신동엽이 경악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난 이따 세수 안하고 집에 갈라고 했는데 하며 어의없어 했다가 세수를 강요받고 해가 중천에 뜬 거리로 나왔다. 던킨을 향해 가는데 교대의 명물 곱창집들이 즐비.. 눈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우리 방금 먹은 거 밥 아니냐며 스스로를 질책해야 했다. 하지만 던킨에서 나와 결국은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놀부 순대국집에서 순대맛 순대국+가래맛 막국수+사워크림맛 갈비탕을 영하 15도에서 먹고 하루 해가 다 저물어서야 귀가를 했다. 뒤풀이로 롯데월드 갈 뻔했는데 그것보다는 양호했음.

내년에는 쌍쌍파티를 추친하자꾸나

개리같은 스타일 괜찮겠어?ㅎㅎ 

 

 

Up(2009)

 

감독 피트 닥터, 밥 피터슨│목소리 에드워드 애스너, 조단 나가이, 밥 피터슨, 크리스토퍼 플러머

 

지나가버린 어린시절에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꿈도 꾸었지

그리고 프레드릭슨 할아버지는 예쁜꿈을 이루셨네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2007)

 

감독 시드니 루멧│출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에단 호크, 마리사 토메이, 알버트 피니

 

뜨겁고 차갑고 뜨겁고 차가워서 욱신거린다.

 

2009년 12월 26일 토요일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그래 알고있어 지금 너에게 사랑은.. 피해야 할 두려움 이란 걸

불안한 듯 넌 물었지 사랑이 짙어지면 슬픔이 되는 걸 아느냐고

하지만 넌 모른거야 뜻 모를 그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걸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In The Valley Of Elah(2007)

 

감독 폴 해기스│출연 토미 리 존스, 샤를리즈 테론, 수잔 서렌든

 

어릴 적에는 이런 비극 애도물을 많이 좋아했었다. 배우도 스토리도 빠르게 희미해지지만 지구본 위에 구멍을 하나 더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구멍들이 너무 많아져서 지구본의 형태가 이그러져 버렸고 특히 아메리카대륙은 초박살 상태다. 나 또한 더 이상 포장지가 군데군데 붙어있는 사탕은 먹기가 거북스러워 말끔한 상태의 사탕이 아니고서야 반갑지도 않다. 

반전 좋다. 더욱이 미국에서 들려오는 반전 목소리이니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까발리기가 좀 밋밋하다.

미국이 한 짓거리들을 이렇게 차분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어쨌거나 미국도 피해자라며,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개인의 문제로 결론지어가니 할 말이 없어서 짜증이 났다.

성악설은 없고 환경결정론만 가득한 이야기에 혼란이 온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개쉐끼집단이라는 나의 마인드에 혼란이..

이 영화가 제작 된 지 2년여가 훌쩍 넘었는데도 가시적인 변화는 전혀 못찾겠고, 노벨평화상 받더니 오바마마저 흡혈귀가 된 이 마당에 이게 르포나 반성문이 아닌 고도의 프로파간다물로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나. 내가 좀 격양되었다손 쳐도

 

 

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The Horribly Slow Murderer with the Extremely Inefficient Weapon(2008)

 

감독 리차드 게일│출연 폴 클레멘스, 마이클 제임스 카시

 

정작 부천에서는 시사실 눈팅만  천 번하고 위디스크에서 겓..

정말 죽을때까지 숟가락으로 패겠다는 치밀함이 레알 호러다

 

Los Abrazos Rotos(2009)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출연 페넬로페 크루즈, 안젤리나 몰리나, 루벤 오칸디아노, 로라 두에나스

 

인생에서 사랑은 정말로 큰 일

Sherlock Holmes(2009)

 

감독 가이 리치│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드 로, 레이첼 맥아담스, 마크 스트롱

 

가이 리치의 시리즈물이라..겔겔겔겔

내 두 훈남을 만날라고 개봉 첫 테입 끊었소

 

Rosso come il cielo(2006)

감독 크리스티아노 보르토네│출연 프란세스코 캄포바소, 루카 카프리오티, 마르코 코치, 노먼 모자토

 

감동실화 특유의 2% 부족함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김씨표류기

 

감독 이해준│출연 정재영, 정려원

 

미래의 짜파게티를 위하여 오늘 하나의 옥수수를 심자

사회가 만들어논 장난질에 농락당해서 좌절하는건 부끄럽다

 

나도, 괜찮아요!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6시간톡크

DMZ만남 이후 2012벙개 실패 어느새 계절이 한 번 더 변해있었다.

백만인의 무한도전조차도 시청하지 않던 우리 희진언니가 화성인 바이러스와 남녀탐구생활에 이어 연애불변의 법칙까지 발을 디디셨다가 심하게 데이고 오셨다. 그런 슈레기만발 프로그램은 보지도 듣지도 말자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어쩌다 저쩌다 보니 3시반에 시작한 톡크가 9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이났다.

언제나처럼 언니와 얘기하고 나면 어정쩡한 20대의 치기어림이 다독거림을 받고 멋진 삶들을 만나게 되고 항상 기분이 좋다. 퐈이팅이다 크핫핫핫

일년내내 죽도록 일하다 연말에 시궁창으로 빠지는 우리들의 라이프는 다 조만간 대박나기 위한 과정일뿐이라고! 연말 즐겁고 활기차게 보내고 연초에 언니의 아트센터 입성에 발맞춰 삼청동 와인바 고고씽!

아무튼 오지게 추운 오늘 전철역 세정거장 이웃 희진언니와 즐거운 런디너 *^^*

한 두달 무지막지하게 놀았더니 동글동글 내 얼굴

모자이크 기능이 없어서 아쉽..

2009년 12월 14일 월요일

여배우들(2009)

감독 이재용│출연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디에디터스+연예가중계+무릎팍도사

그래도 예쁜 여배우들을 104분동안 보는 일이 그리 지겹지는 않았다.

HOPE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Happy Christmas!

 

올해는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Alfie(2004)

 

감독 찰스 샤이어│출연 주드 로, 마리사 토메이, 오마 엡스, 니아 롱

 

 

주드로가 매력없기도 쉽지 않은데..

재미없는 것보다 좀 더 심했다

 

영상이랑 색감은 딱 내취향인데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그 때 불쑥 내 눈 앞에 나타나 나는 연애소설입니다. 라고 말했다.

2년 전 쯔음부터 항상 예스24 장바구니에 담겨있는 채로 오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져 왔다.

연애소설은 필요 이상의 감정소모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여 황경신의 <모두에게 해피앤딩> 이후로 끊었던. 처음 읽는 가벼운, 장편, 연애 이야기.

양장껍데기 뒷편에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라고 씌어있다.

위험한 발상.

우리의 사랑은 없다. 하물며 타인의 사랑이라고.

내 사랑만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랑이 무사해서 내 사랑이 위험해질 수가 있다.

 

한 백여장을 읽으니 이것도 연애소설의 클리셰일 뿐이다.

그래도 이거 읽느라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다.

인생, 사랑 다 뻔한데 그래도 항상 흥미진진하잖아. 그리고 약간의 대리만족..

The Straight story(1999)

 

감독 데이빗 린치│출연 리차드 판스워드, 씨씨 스페이식, 해리 딘 스탠든, 제인 갤로웨이

 

사는 모습은 다들 귀엽다.

다들 귀여워.

앞으로는 어의없고 황당해도 그냥 귀엽다하자 귀여우니까.

 

그대 손으로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Kill Bill : Vol.1(2003)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출연 우마 서먼, 루시 리우, 비비카 A. 폭스, 마이클 매드슨

 

 

나도 모르게 자꾸 얼굴을 닦아냈다. 손에 피가 흥건히 묻어 나올 것만 같아서 ㅎㅎ

데쓰노트가 적고 싶을때마다 봐줘야겠군. 댕강댕강

 

...

 

Thanks GOD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Cafe Lumiere(2003)

 

감독 허우 샤오시엔│출연 히토토 요, 아사노 타다노부, 하기와라 마사토, 요 키미코

 

 

그대곁에 공기처럼

 

이 노래

내가 듣던 음악을 네가 듣고 내가 듣던 음악은 너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고

네가 듣던 음악을 내가 듣고 네가 듣던 음악은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고  

그런 너와 나의 음악들은 이제 완전히 멈춰 버렸다

우리는 이제 지구를 거꾸로 돌고 있으니 결코 다시는 서로에게 들려 줄 수 없겠지

좋은 음악을 들으니 네가 또 어김없이 생각이 나

하지만 이젠 너를 위한 것들이 아니야..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대한민국 공화국 변천사

공화국은 헌법개정이 아니라 헌법상 대통령제인가 아니면 내각제인가 또는 대통령제라도 대통령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1공화국에서 2번의 개헌이 있었고 3차개헌에 의하여 내각제(2공화국), 2공화국 시절 1번의 개헌 5차개헌에 의하여 대통령제(3공화국), 3공화국 시절 1번의 개헌이 있었고 7차개헌에 의하여 유신정권(4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개정에 따라 공화국 명칭을 붙인다고 하면 어패가 있다.

 

- 1공화국 순수한 미국식 대통령제. 3권분립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체제이며 이 당시에 2번의 개헌(발췌,4사5입)이 있었다.
- 2공화국 내각제(국무총리가 내각수반).  4.19 이후 대통령제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독재를 피하기 위하여 내각제를 선택했다고 보면 됨.이 시기에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인물등을 처벌하기 위한 별도의 헌법개정이 있었다.

- 3공화국 대통령제로 환원. 5.16 이후 박정희에 의한 대통령제로 이 시기에 또 박통의 3선을 위한 3선개헌이 있었다.
- 4공화국 영도적 대통령제. 대통령제이면서 대통령이 입법,사법부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는 대통령제로 유신헌법하의 대통령
- 5공화국 우월한 위치의 대통령제. 유신헌법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강력한 힘을 보유했던 대통령제. 전두환시절
- 6공화국 대통령제. 3권이 균등한 힘을 가지는 대통령제

제 6공화국 이후에 공화국이 변천하지 않는 이유는  개헌시 공화국의 명칭이 바뀌는게 원칙인데 마지막 개헌이 노태우대통령때였고 지금까지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금은 제 6공화국인 것이다.

 

제1공화국 이승만대통령(1~3대) 1948-1960
제2공화국 윤보선대통령(4대) 1960-1962
제3공화국 박정희대통령(5~9대) 1963-1979
제4공화국 최규하대통령(10대) 1979-1980
제5공화국 전두환대통령(11~12대) 1981-1988
제6공화국 노태우대통령(13대) 1988-1993
                김영삼대통령(14대) 1993-1998
                김대중대통령(15대) 1998-2003
                노무현대통령(16대) 2003-2008

                이명박대통령(17대) 2008-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그리하겠다며

세상이 이리도 변하고 사람들도 그리도 변하고 있는데 나만 코끼리 코 돌기 하고 있을 순 없지 않냐며

이천십년 쌍코피 줄줄 세상은 넓다 프로젝트로 후회없이 살고

그래도 안되면 정말 내년에는 모든 외로움을 감수하고 외쿡으로 떠나버리겠다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어서라도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겠다며

어흫흫 아자자

아 정말 난 모세혈관까지 대한민국 체질인데ㅜㅜ

시발스러워

새벽까지 쪽잠을 자며 한마리라도 더 닭을 팔려는 세 아이의 어머니

그녀의 손과 얼굴이 거칠어질수록, 빨갛게 눈이 충혈될 수록 어째 빚만 더 늘어날 뿐이다.

그놈의 삽질이 퍼 담을 줄도 좀 알면 좋으련만

역행하는 세상 속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참으로 허망하게 느껴져 잠이 안온다

아 정말 시발스럽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감독 박광수│출연 문성근, 홍경인, 김선재

 

아름답다.

더러운 시대의 꽃이여

 

2009년 12월 3일 목요일

<한홍구>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

요즈음 신문을 보면 혹시 시계가 10년쯤 거꾸로 돌아가 1994년 여름의 주사파 소동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중앙일보>는 김일성방송대학이 이미 5년 전에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것을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북 주체사상 인터넷 공습’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11월11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이에 뒤질세라 다음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70여일 전에 조합원들을 상대로 개최한 공무원노동자학교 교육 내용에 주체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들어 공무원노조의 조합원 교육에 주체사상이 포함되었다며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5년 전에 시작한 인터넷 강의도, 70여일 전에 100명도 안 되는 조합원 모아놓고 행한 교육 내용도 대한민국의 일등신문 자리를 놓고 피말리는 경쟁을 하는 두 거대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올려놓다니, 참으로 놀라워라, 주체사상의 괴력이여!

박홍, 해프닝의 추억!

10년 전, 북의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조문 파동이 벌어지더니, 곧이어 주사파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당국은 일부 대학에 설치된 김일성 주석 분향소를 철거하고 학생들을 구속했다. 이 일로 이른바 ‘북핵 위기’를 지나 정상회담 일보 직전까지 갔던 남북 관계는 김영삼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에 한명의 스타가 다시 등장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출신에 서강대 총장으로 있던 신부 박홍,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당시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여 전대미문의 ‘유서대필’ 사건을 초래한 바로 그 인물이 다시 험한 입을 열었다.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 돌아온 것이다.

박홍은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초청 오찬에서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되어 있다면서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얼마 뒤 그는 “북한에 초청되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남한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발언을 했고, 몇몇 교수들은 공안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홍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연일 주사파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박홍의 입을 쳐다보기는 언론만이 아니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을 꼭 극장에 가야 볼 수 있지는 않았다. 마치 박홍이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인 듯 그의 말 한마디에 주사파 사냥의 화살은 과녁을 옮겨다녔다.

제자인 학생들을 주사파로 고발한 ‘스승’은 <조선일보>에 의해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 신문은 한 면을 털어 사회가 그의 용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각계 ‘지식인’들의 동조발언을 실었다. 그런데 이 용기 있는 신부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연일 쏟아내는 놀라운 주장들의 ‘증거’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박홍은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조선일보>의 한 논객은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박홍의 발언을 놓고 “일부의 인사는 증거를 대라고 추궁”하는데 “증거 요구는 망발”이며 “천치가 아닌 한 누구도 물증을 고스란히 모두 남겨놓으면서 혁명운동을 꾸미지는 않는다”고까지 주장했다.

주사파의 뒤에는 사노맹이 있다는 말에 가장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아마도 사노맹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90년 안기부에 의해 일제 검거된 사노맹은 남쪽의 운동 진영에서 친북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사파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반대하는 그룹으로서 주사파들과 첨예한 사상투쟁을 전개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정통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북이나 주체사상을 사회주의를 벗어난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편향이라고 비난해왔다. 그냥 비난해온 정도가 아니라 남쪽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주사파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집단이 사노맹이었다.

 

사노맹은 억울하다?

그런데 졸지에 사노맹이란 이름이 북의 청년단체인 사로청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이 혐오하는 주사파의 배후이자, 사로청의 지시를 받는, 말하자면 남쪽의 주사파를 북과 연결해주는 고리로 지목되었으니 그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노맹이 주사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점은 민족민주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명칭이 비슷하다고 이렇게 연결지어 놓은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조선일보>의 평가가 100% 잘못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만큼은 확실했다. 애들 잘 쓰는 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더라만….

남쪽에 주체사상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85년 말부터이다. 일부 학생들이 북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방송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북의 주체사상을 방송을 통해 받아들이기까지 남쪽의 민족민주운동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1970년대 후반에는 남미의 상황을 설명하는 종속이론이 수입되어 꽤나 유행했다. 그러나 머나먼 남미의 종속이론은 아무래도 우리 처지와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웃한 중국혁명의 경험에서 마오쩌둥의 사상과 혁명이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마오의 이론은 다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통이론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레닌에 이어 사람들은 스탈린을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원전(原典)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원전 속에 저 광주의 학살자를 몰아내는, 모순에 찬 자본주의를 일거에 해결하는 비법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몇번씩 복사해서 글자가 뭉개진 책을 몰래 돌려보았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타자를 쳐서 복사한 아주 조잡하게 번역된 원전들의 한국어판이 돌기 시작했다.

원전의 공부도, 사회과학 공부도 역사가 길지 않았다. 현대사 연구는 광주를 거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놀라운 학구열과 첨예한 의식을 가진 어린 학생들, 그러나 복잡한 세상은 희미한 원전 복사본에 사회과학 서적 몇권 읽은 지식으로 분석하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누가 해주지 않는 작업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 사회 내부의 계급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과의 문제 또는 북과의 통일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가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채 소화되지 않은 이론과 지식으로 얽히고설킨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니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말도 글도 너무 어려워졌다. 글 쓴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는데,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사람들은 생경한 사회분석을 그대로 조직론과 실천론에 적용하고 그것을 과학이라 믿었다. 논쟁 판에는 이미 머리에 쥐가 난 사람들과 곧 나려는 사람들 두 부류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속이론을 지나 레닌을 건너…

주체사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주체사상이 남쪽에서 일거에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우선 쉬웠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사회구성체 논쟁에 질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단순명쾌하게 풀어버리는 주체사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든 것은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약어)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의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번잡할 대로 번잡해진 사회구성체 논쟁과는 달리 이제 ‘고민 끝, 실천 시작’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서구의 신좌파에서 남미의 종속이론을 거쳐 중국의 마오이즘을 지나 마르크스를 만나고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볼셰비즘으로의 긴 여정 끝에 사람들은 마침내 원산지가 조선임을 주장하는 주체사상을 만난 것이다. 이제 번역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번역의 시대가 종식되었다는 것이 곧 남쪽 운동 진영이 정말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기 얘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번역의 시대보다 더 어두운 ‘받아쓰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받아쓰기의 시대는 화려하게 개막되었다. ‘강철’이란 서명에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은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널리 퍼져갔다. ‘강철서신’은 마치 무협지에서 새로운 고수가 강호를 평정하듯 새로운 신화를 낳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활동가의 품성을 강조했다. 이론만이 남아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던 당시의 풍토에서 사람냄새 물씬 나는 품성에 대한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철서신’에서 미국은 미국놈도, 미제도 아니었다. ‘노린내 나는 양키’였고, 각을 떠도 시원찮을 존재였다.

나는 이 무렵 스칼라피노,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번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주요 연설문을 비롯하여 북에서 나온 각종 서적이나 문헌들을 이미 많이 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강철서신’의 출현은 북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펴는 집단이 남쪽의 운동 진영 내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내게는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북의 원전을 이미 본 입장에서 볼 때 강철의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북의 원전을 접할 길이 없었던 일반 청년학생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강철 김영환은 사상의 불모지였던 남쪽에 주체사상을 꽃피운 자생적 주체주의자로 추앙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쪽의 운동 진영을 위해서도, 김영환 본인을 위해서도, 주체사상을 위해서도 크나큰 불행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김영환의 착각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1999년, 김영환은 강철이 아니라 간첩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밀입북하여 김일성까지 만난 남쪽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 이전의 조직 사건에서 조작과 침소봉대라는 의혹을 받던 국정원은 이 사건의 경우 축소 수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김영환을 공소 보류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강철 김영환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반성문을 국정원에서 작성했고, <조선일보>는 주사파 대부의 반성문을 특종 보도했다.

이 무렵 김영환이 <신동아>와 한 인터뷰를 보면 기가 막히도록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김일성을 직접 만난 김영환의 평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가 만나서 얘기해본 바에 의하면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만 꺼냈지 실제로 김일성이 하는 얘기에는 주체사상의 내용이 녹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혀 없었어요.” 얼치기 신학생이 예수님 만나 몇 마디 대화 나누고 ‘기독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라고 얘기하는 것과 한가지이다. 앞뒤가 꽉 막힌 유생이 <논어> 달달 외고 공자님 만나 문답을 하다가 사람을 보아가며 똑같은 이치를 다르게 설명해주는 공자님보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모른다고 비판하는 격이다.

김영환은 자신이 밑줄 그어가며 달달 외운 주체사상 해설서나 논문을 생각하며, 김일성이 주체사상에 대해 모른다고 용감하게 말한 것이다. 김영환이 공부한 주체사상은 황장엽 등이 당의정을 입힌 주체사상이다. 자주성이니, 창조성이니, 의식성이니 하는 용어들이 그런 당의정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약을 보고 당의정만 기억해서 노란 약, 주황색 약 등등 색깔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색깔은 약의 본질과는 전혀 다르다. 황장엽 등 이론가의 역할은 약에 당의정을 입히고, 포장을 하고, 설명서를 단 것이지, 약을 만든 것이 아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잘못 알려진 황장엽의 역할은 당의정 입힌 정도로 수정되어야 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주체사상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의 건설 과정에서 교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북에서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사상 체계로 너무 뻥튀기하지 않고 하나의 삶의 태도로 설명했더라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버렸다. 강철 시절의 김영환에게 북은 남의 대안이자 ‘절대선’이었다. 항일 무장투쟁의 신화와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건설! 일제의 강점과 분단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요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노린내 나는 양키의 군홧발 아래” 짓밟힌 남녘에서 자란 세대에게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북은 이상향처럼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이라면 남쪽이 북에 비해 경제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그 격차가 오늘날처럼 비교할 수 없게 벌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현실정치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체제인 북을 ‘절대선’으로 본 것도 비극이지만, 김영환은 이런 잘못을 깨닫고는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수구세력의 품에 안긴 채로…. 그가 쓴 ‘강철서신’의 히트작 ‘간첩 박헌영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고 자란 세대는 “간첩 김영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주사파(注射派) 소동은 계속된다

남쪽이 민주화가 되고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마당에서 아직도 주사파 소동은 벌어지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사파도 한 가지 브랜드가 아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북의 체제 우위를 주장하는 주사파(主思派)는 이제 거의 멸종위기이다. 그런데도 주사파가 나타났다고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또 다른 주사파(酒邪派)로 분류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술 마시고 어쩌다 주사 부리는 것이라면 한숨 쉬며 참아줄 수 있겠다. 그런데 술 취하지도 않고 아무나 보고 주사파, 주사파 하고 주사를 부리니 참 더불어 살기 고약한 존재들이다. 더 악질적인 주사파는 주사(注射)를 맞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속된 말로 뽕쟁이라 하는 주사파(注射派)들이다. 제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무언가가 주입되어야만 움직이는 족속들, 약기운이 떨어지면 심한 금단현상을 보이는 부류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더니 주사파(主思派)와 주사파(酒邪派)가 만나 새로운 주사파(注射派)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겨레21>

<한홍구> 뉴라이트는 '품성'을 갖춰라

광주의 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대학가는 수백명의 동포를 학살한 자가 대통령으로 거들먹거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학생들은 학살의 원흉을 끌어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종속이론에서부터 일본의 강단 마르크시스트들이 쓴 여러 가지 책이며, 마오쩌뚱의 사상이며, 레닌의 이론이며, 스탈린의 교과서까지…. 그리고 주체사상마저 들어왔다.


사실 이런 이론들은 입시 준비에 찌들어 변변한 인문교양서를 읽을 틈도 없이 사춘기를 보낸 대학생들에게는, 전문가인 교수들이 강의실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충분히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공군사 독재 아래서, 학보에 실을 원고에 ‘계급’이란 말만 써도 모조리 ‘계층’으로 고쳐놓는 교수님이 계신 대학가에서 이런 수입 혁명이론들은 정상적인 유통경로를 거칠 수 없었다. 이른바 386 세대의 학생들은 1년 전에는 똑같이 아무것도 몰랐던 선배가 거칠게 한두번 씹어준 이론을 자취방에서 벌어진 세미나에서 받아먹었다. 그런 소화되지 못한 이론조차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70년대 세대들은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눈빛이 달라진 후배들이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론으로 무장하는 것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경외감이나 어쩌면 부러움을 갖고 바라보았다.


1980년대는 사상의 시대였다. 그러나 미숙한 시대였다. 모두들 사상이, 세계관이, 철학적 입장이 중요하다고 거품을 물었지만, 정작 사상의 내용은 채우지 못한 그런 시대였다. 그래도 사상은 중요했다. 저 강력한 군사독재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면 사상적 준비가 필요했고, 대열의 사상적 통일과 단결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실무적인 일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에서도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사상적 입장이나 세계관이 달라서 그렇다며, 몇달씩 변증법적 유물론을 공부하자고 계획을 잡는 것도 별로 낯선 일이 아니었다. 뭐든지 변증법을 끌어다가 설명하려 들던 그 시절에 변증법, 참 여러 군데서 고생 많았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사상투쟁이나 사상운동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던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 그 시절 사투(사상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머리로든 발로든 운동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정말 오랜만에 사상운동이란 말을 다시 들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말을 다시 살려낸 사람들은 이른바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나선 이들. 수구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그들은 “노무현 정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사상을 생산하고 확대하는 ‘사상운동’이 필요하고도 긴급”하다며, “사회 곳곳에 자유주의 진지를 구축하고 자유주의를 시대담론으로 만드는 사상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뉴 라이트 운동 관계자들은 이 운동이 현실정치와 어떤 관련을 맺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사상운동이 성공하면 현실정치에 참여할 시점이 올 수도 있다”고 답했다. 20대 시절, 눈 동그랗게 뜨고 사상투쟁 하자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나이 40이 넘어서도 역시 눈 부릅뜨고 사상투쟁 하자고 하는 것이다.


뉴 라이트가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새롭기에 이름에다 ‘뉴’를 달고 나왔을까?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비판해대는 ‘수구 보수’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저 유명한 김용갑 의원이 “뉴 라이트의 주장이 바로 내 주장”이라고 반색을 하고 나올 정도로 뉴 라이트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두드러진 차이는 하나,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나선 ‘자유주의연대’라는 단체의 주요 간부들이 이른바 386 운동권, 그것도 말 많고 탈 많은 주사파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제 그들이 40대가 되어 자신들은 더 이상 운동권 386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자유주의 486’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10년간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골방에서 열심히 10년간 연구개발해서 들고 나온 모델이 486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 세상은 펜티엄급도 머잖아 낡은 모델이 될 정도로 확확 변하고 있는데.


이들 486을 불러낸 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이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 칼럼은 “‘주사파 386’의 약점과 정체를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들의 천적(天敵)”인 ‘자유주의 486’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물으면 ‘색깔론’이라고 길길이 뛰면서도 남을 향해서는 걸핏하면 ‘보수꼴통’ ‘수구냉전’이라며 ‘역(逆) 색깔론’을 펴는 ‘주사파 386’들의 아킬레스건에 ‘예리한 비수를 던져야 한다”는 격문을 썼다. 이 격문은 “전함 12척은 분명히 남아 있다”라는 결연한 말로 끝을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해직된 사이, 134척의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되어 겨우 12척의 배만 남았다.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 그는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있고 미천한 신도 죽지 않았습니다”(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을 인용한 이 글은 1980년대 뉴 라이트 중심인물들이 주사파로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 국책연구기관의 어느 교수가 자못 비장하게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격문을 날린 이래, 그 동네 최고의 명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수구의 항구에 가보니 배야 12척이 아니라 100척도 넘게 남아 있다. 문제는 배가 없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이 없다. 아니, 이순신을 만들어낸 민중의 아픔과 희망이 수구의 진영에는 처음부터 없었다.


무엇보다 뉴 라이트들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극단적이다. 1980년대에는 너무 쉽게 사회주의자가 되고 너무 쉽게 주사파가 되었다면, 지금은 너무 쉽게 뉴 라이트가 되었다. 사실 이들이 주체사상을 들고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주체사상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였다. 당시 운동 진영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북을 때려잡아야 할 ‘북괴’가 아니라 함께 통일을 이루어야 할 민족의 절반으로, 새롭게 사귀어야 할 친구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뉴 라이트들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들에게 북은 새롭게 사귀어야 할 벗도, 오랫동안 갈라졌던 형제도 아니었다. 뉴 라이트들이 핵심을 이룬 주사파들은 북을 이남의 혁명까지 지도해야 할 지도부로 섬겼다. 그들은 수령론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며, 민족자주와 통일의 과제를 폭넓게 끌어안는 집단 내에서 사상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수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이 참된 운동가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들이댔다. 그리고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생신’이 오면 탄신을 ‘경하’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가서, 너무 조급하고 교조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하는 짓은 똑같다. 나이로는 불혹의 40대에 접어들었고, 사상적으로는 전향을 했다지만, 하는 짓은 똑같다. 다만 그때는 왼쪽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지금은 오른쪽으로 치달아 놀라게 하고 있다. 그 시절 운동 진영에서 잘 쓰던 말에 ‘소아병’이란 말이 있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극단적인 언행만 일삼는 미성숙한 태도를 야유하는 말이다. 주입식 교육에 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던 20대 시절에 이 돌림병에 걸리는 것은 어쩌면 통과의례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나이에 책임을 져야 할 40대에 이르러서도 그 병을 앓고 있다니 참 딱한 노릇이다.


새 모자를 갈아쓰고 새 장갑을 갈아끼듯, 그들은 주체사상을 버리고 자유주의를 선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사상을 중시해서, 삐꺽하면 사상투쟁을 벌이고 사상운동을 하자는 자들이 사상을 부속품 갈아끼듯 바꿔치기하는 모습은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상의 숙성과 내면화를 거치지 않고 이렇게 부속품을 갈아끼우듯 하는 것이야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일는지 모르지만, 제발 그런 걸 전향이라고 남들에게까지 강요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북을 수령으로 떠받들며 북의 방송을 받아쓰기-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받아쓰기, 맞춤법 엄청 틀렸다- 해서 열심히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더니만,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옛날에 주사파로 활약해서 잘 아는데 과거 학생 운동권의 다수는 주사파였고, 요즘 정권에 진출한 386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떠들고 있다. 즉, 자기네가 열심히 만들어 뿌려댄 유인물을 받아 읽은 사람들을 지금 주사파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미친 X 널 뛰듯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힘껏 내달려가 과거에 알던 누군가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전향이 아니란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한번의 큰 좌절을 겪었을 텐데,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독선적인 태도와 승리에 대한 확신만큼은 변함없이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 동네에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는 금지곡임에 틀림없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기에 “우리는 진실과 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한다”고 마구 떠들어댈까? 그들이 20대일 때는 마치 거짓과 반지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좌절했다는 것일까? 공안기관의 밀실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전향에서 우리는 깊은 반성과 좌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한쪽으로 돌진하다가 쾅 머리를 들이박고는 “이쪽이 아닌가벼” 하며 또 반대쪽으로 달려간다. 더 빨리 달려간다. 그러면서 자신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아온 386 세대들은 “속성 재배로 인한 심각한 지적 빈곤”에 빠져 있으며, “386 자신을 선이며 도덕적 가치로 확신하는 황당함”은 바로 이런 속성 재배와 지적 빈곤의 산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거의 386들에게 이런 속성이 있었다면, 그런 특징을 가장 많이 가진 부류는 주사파였고, 주사파 내에서도 바로 그들이었다. 20년 세월이 흘러 아직도 그런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뉴 라이트들이다. 그들과 함께 운동을 했던 한 사람은 자신이 오히려 “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냐고 그들에게 따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뉴 라이트를 자처하는 주사파들의 변치 않은 점은 언제나 자기들이 각광을 받으며 무엇인가가 되고자 했다는 점이다. 단 한번도 노동의 땀방울로 밥을 벌어먹은 적이 없는 처지에 노동운동을 지도하겠다고 나서고, 노동운동가를 자처하며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문건을 만들어 배포하고, ‘사상적 지도자’인 자신들은 공장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지도’를 받는 동료와 후배들을 서슴없이 공장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 시대의 사상적 지도자를 자처하며 일대 사상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선다. 1980년대는 전두환 같은 자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에, 단 한번도 제 몸을 놀려 노동의 의미를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자들이 노동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실제 노동운동을 하던 일부 활동가들도 그들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런 시대였다. 그들이 한때나마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살인마 전두환이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사람들, 갈라진 조국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었던 활동가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뉴 라이트 뒤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다. 오로지 두 차례의 대선 패배로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감에 휩싸인 수구만이 있을 뿐이다.


뉴 라이트가 각광을 받는 꼴을 보면서 서글퍼지는 것은 그들이 딱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설치는 바람에 진짜 합리적인 보수세력의 출현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뒤 얼마 되지 않았던 2001년 여름에 나는 진작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은 똥과 된장만큼 차이가 난다며, 보수세력 스스로 수구와 결별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2001년 8월8일자, 제371호) 또 지난 탄핵 사태 때도 혼자서 “돌격 앞으로!” 하고 뛰쳐나갔다가 고립돼버린 수구세력을 분리 수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구세력은 분리 수거되지 않았다. 대신 뉴 라이트라는 새 피를 수혈받았는데, 이들 뉴 라이트는 자유주의라는 장식품만 들고 나왔을 뿐 그 행각은 수구세력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수구세력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는 뉴 라이트 같은 부류가 설쳐대며 물을 흐려놓을수록 한국 사회의 진로에 대해 진짜 보수적인 대안을 제시할 만한 합리적이고 차분한 집단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을 하는 김용한 박사의 ‘침 뱉기’ 비유를 빌리면 뉴 라이트는 여러 명이 같이 먹으려고 마련한 큰 비빔밥 그릇에 침 뱉는 짓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침을 뱉으면 보통 사람들은 더러워서 숟가락을 놓을 수밖에 없고, 결국 비빔밥은 침 뱉은 놈이나 침 뱉은 밥도 먹을 수 있는 막강한 비위를 가진 자들만의 몫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뉴 라이트마냥 남의 등에 칼을 꽂아야 행동하는 보수 지성으로 찬양을 받는 세상이니, 등 뒤에 칼 꽂는 짓 대신 정책과 대안으로 승부를 해보려는 차분한 보수 지식인들이야 어디에 설 수 있을까?


뉴 라이트나 나나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고,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할 수 있다. 젊은 독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나이 타령을 좀 해야겠다. 본격적으로 나이 먹어가기 시작하니까 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좀 달라지는 것이 감지된다. 80년대의 질풍노도 시대를 살아온 나 역시 한때 이념과 사상을 중시했다. 광주에 대한 태도, 미국에 대한 입장,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했다. 뉴 라이트들마냥 ‘위수동’ ‘친지동’ 탄신을 챙기는 짓은 안 했어도, 북에 대한 입장은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별로 나이 많지도 않은 40대에 들어서도 운동의 현장에 남아서 작은 일이라도 거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살아오면서, 또 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아니면 그놈의 정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상이나 이념, 너무 절대화하지 말자. 어디 전태일이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일까?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희한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뉴 라이트를 보면서 자꾸 드는 생각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이 결코 이념 때문에 벌어진 논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대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 40을 넘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다. 좌파 중에도 절대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생각은 보수적이지만 도저한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우파도 있다. 자신들이야말로 지금도 진짜 주체사상파라고 우기는 뉴 라이트들을 위해 주체사상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품성’이 중요한 것이다. 뉴 라이트들이 옛 동료들을 향해 사상 고백을 하라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뉴 라이트 문제,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사상식으로 얘기하면 품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일상의 말로 바꾼다면 ‘싸가지’ 문제일 뿐이다.

<한겨레21>

2009년 12월 2일 수요일

잉여잉여잉여

잉여게이지 폭발

하루만에 미드를 시즌 세개나 클리어하고 현관문 밖으로 1초도 안나간지 약 40시간째임

간지나는ㅜㅜ2010년 재수생모드를 위한 잉여게이지마저 차고 넘친다-_-

어제 채널 파도타기에서 올리브티비의 클로저가 걸려 의식적으로 돌려버렸는데 결국 오늘 파토타기에 걸린 XTM의 클로저는 다봤다. 주드로와 나탈리포트만의 대사는 돌돌이도 외울 지경인데 또 봤다. 카우치포테이토의 결말은 비극이다.. 내일은 CGV의 클로저를 보고 있을지도..

내일부터 이번주 주말까지는 알람에 맞춰 눈뜨고 바로 머리 감고 집을 벗어나는 바이오리듬을 구축하고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부할꺼닷

최측근들과의 망년회와 메리크리스마스 밀월여행을 위해 12월초는 도서관과 영상자료원에 반납하겠스므이다. 일단 오늘부터 라천을 끊고 자정전에 잠을 들자

잉여탈출!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바람(2009)

 

감독 이성한│출연 정우, 양기원, 손호준, 권재현

 

나는 영화가 좋다. 그래서 매일 영화를 본다.

오늘은 미장센을, 네러티브를, 영상 미를, 감독의 의도를 머리 깨지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내가 2차 시험에다 써놓은 순박한 답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김정국(정우의 본명)의 자전적 이야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누군가의 혹평에 난 반기를 들고 싶다. 사람들 저마다에게 수천가지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전문가들의 개인적인 평과 느낌으로 세뇌시키려는 듯한 단호한 평론으로 획일화 시키는 건 말도 안된다.

모든 것에는 여지라는 것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바람>은 동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써 매우 즐거운 영화였고 정우라는 배우의 매력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