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일 목요일

<한홍구>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

요즈음 신문을 보면 혹시 시계가 10년쯤 거꾸로 돌아가 1994년 여름의 주사파 소동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중앙일보>는 김일성방송대학이 이미 5년 전에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것을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북 주체사상 인터넷 공습’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11월11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이에 뒤질세라 다음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70여일 전에 조합원들을 상대로 개최한 공무원노동자학교 교육 내용에 주체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들어 공무원노조의 조합원 교육에 주체사상이 포함되었다며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5년 전에 시작한 인터넷 강의도, 70여일 전에 100명도 안 되는 조합원 모아놓고 행한 교육 내용도 대한민국의 일등신문 자리를 놓고 피말리는 경쟁을 하는 두 거대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올려놓다니, 참으로 놀라워라, 주체사상의 괴력이여!

박홍, 해프닝의 추억!

10년 전, 북의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조문 파동이 벌어지더니, 곧이어 주사파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당국은 일부 대학에 설치된 김일성 주석 분향소를 철거하고 학생들을 구속했다. 이 일로 이른바 ‘북핵 위기’를 지나 정상회담 일보 직전까지 갔던 남북 관계는 김영삼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에 한명의 스타가 다시 등장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출신에 서강대 총장으로 있던 신부 박홍,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당시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여 전대미문의 ‘유서대필’ 사건을 초래한 바로 그 인물이 다시 험한 입을 열었다.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 돌아온 것이다.

박홍은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초청 오찬에서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되어 있다면서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얼마 뒤 그는 “북한에 초청되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남한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발언을 했고, 몇몇 교수들은 공안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홍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연일 주사파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박홍의 입을 쳐다보기는 언론만이 아니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을 꼭 극장에 가야 볼 수 있지는 않았다. 마치 박홍이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인 듯 그의 말 한마디에 주사파 사냥의 화살은 과녁을 옮겨다녔다.

제자인 학생들을 주사파로 고발한 ‘스승’은 <조선일보>에 의해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 신문은 한 면을 털어 사회가 그의 용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각계 ‘지식인’들의 동조발언을 실었다. 그런데 이 용기 있는 신부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연일 쏟아내는 놀라운 주장들의 ‘증거’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박홍은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조선일보>의 한 논객은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박홍의 발언을 놓고 “일부의 인사는 증거를 대라고 추궁”하는데 “증거 요구는 망발”이며 “천치가 아닌 한 누구도 물증을 고스란히 모두 남겨놓으면서 혁명운동을 꾸미지는 않는다”고까지 주장했다.

주사파의 뒤에는 사노맹이 있다는 말에 가장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아마도 사노맹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90년 안기부에 의해 일제 검거된 사노맹은 남쪽의 운동 진영에서 친북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사파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반대하는 그룹으로서 주사파들과 첨예한 사상투쟁을 전개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정통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북이나 주체사상을 사회주의를 벗어난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편향이라고 비난해왔다. 그냥 비난해온 정도가 아니라 남쪽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주사파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집단이 사노맹이었다.

 

사노맹은 억울하다?

그런데 졸지에 사노맹이란 이름이 북의 청년단체인 사로청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이 혐오하는 주사파의 배후이자, 사로청의 지시를 받는, 말하자면 남쪽의 주사파를 북과 연결해주는 고리로 지목되었으니 그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노맹이 주사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점은 민족민주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명칭이 비슷하다고 이렇게 연결지어 놓은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조선일보>의 평가가 100% 잘못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만큼은 확실했다. 애들 잘 쓰는 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더라만….

남쪽에 주체사상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85년 말부터이다. 일부 학생들이 북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방송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북의 주체사상을 방송을 통해 받아들이기까지 남쪽의 민족민주운동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1970년대 후반에는 남미의 상황을 설명하는 종속이론이 수입되어 꽤나 유행했다. 그러나 머나먼 남미의 종속이론은 아무래도 우리 처지와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웃한 중국혁명의 경험에서 마오쩌둥의 사상과 혁명이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마오의 이론은 다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통이론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레닌에 이어 사람들은 스탈린을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원전(原典)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원전 속에 저 광주의 학살자를 몰아내는, 모순에 찬 자본주의를 일거에 해결하는 비법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몇번씩 복사해서 글자가 뭉개진 책을 몰래 돌려보았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타자를 쳐서 복사한 아주 조잡하게 번역된 원전들의 한국어판이 돌기 시작했다.

원전의 공부도, 사회과학 공부도 역사가 길지 않았다. 현대사 연구는 광주를 거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놀라운 학구열과 첨예한 의식을 가진 어린 학생들, 그러나 복잡한 세상은 희미한 원전 복사본에 사회과학 서적 몇권 읽은 지식으로 분석하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누가 해주지 않는 작업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 사회 내부의 계급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과의 문제 또는 북과의 통일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가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채 소화되지 않은 이론과 지식으로 얽히고설킨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니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말도 글도 너무 어려워졌다. 글 쓴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는데,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사람들은 생경한 사회분석을 그대로 조직론과 실천론에 적용하고 그것을 과학이라 믿었다. 논쟁 판에는 이미 머리에 쥐가 난 사람들과 곧 나려는 사람들 두 부류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속이론을 지나 레닌을 건너…

주체사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주체사상이 남쪽에서 일거에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우선 쉬웠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사회구성체 논쟁에 질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단순명쾌하게 풀어버리는 주체사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든 것은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약어)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의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번잡할 대로 번잡해진 사회구성체 논쟁과는 달리 이제 ‘고민 끝, 실천 시작’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서구의 신좌파에서 남미의 종속이론을 거쳐 중국의 마오이즘을 지나 마르크스를 만나고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볼셰비즘으로의 긴 여정 끝에 사람들은 마침내 원산지가 조선임을 주장하는 주체사상을 만난 것이다. 이제 번역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번역의 시대가 종식되었다는 것이 곧 남쪽 운동 진영이 정말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기 얘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번역의 시대보다 더 어두운 ‘받아쓰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받아쓰기의 시대는 화려하게 개막되었다. ‘강철’이란 서명에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은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널리 퍼져갔다. ‘강철서신’은 마치 무협지에서 새로운 고수가 강호를 평정하듯 새로운 신화를 낳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활동가의 품성을 강조했다. 이론만이 남아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던 당시의 풍토에서 사람냄새 물씬 나는 품성에 대한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철서신’에서 미국은 미국놈도, 미제도 아니었다. ‘노린내 나는 양키’였고, 각을 떠도 시원찮을 존재였다.

나는 이 무렵 스칼라피노,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번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주요 연설문을 비롯하여 북에서 나온 각종 서적이나 문헌들을 이미 많이 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강철서신’의 출현은 북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펴는 집단이 남쪽의 운동 진영 내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내게는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북의 원전을 이미 본 입장에서 볼 때 강철의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북의 원전을 접할 길이 없었던 일반 청년학생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강철 김영환은 사상의 불모지였던 남쪽에 주체사상을 꽃피운 자생적 주체주의자로 추앙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쪽의 운동 진영을 위해서도, 김영환 본인을 위해서도, 주체사상을 위해서도 크나큰 불행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김영환의 착각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1999년, 김영환은 강철이 아니라 간첩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밀입북하여 김일성까지 만난 남쪽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 이전의 조직 사건에서 조작과 침소봉대라는 의혹을 받던 국정원은 이 사건의 경우 축소 수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김영환을 공소 보류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강철 김영환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반성문을 국정원에서 작성했고, <조선일보>는 주사파 대부의 반성문을 특종 보도했다.

이 무렵 김영환이 <신동아>와 한 인터뷰를 보면 기가 막히도록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김일성을 직접 만난 김영환의 평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가 만나서 얘기해본 바에 의하면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만 꺼냈지 실제로 김일성이 하는 얘기에는 주체사상의 내용이 녹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혀 없었어요.” 얼치기 신학생이 예수님 만나 몇 마디 대화 나누고 ‘기독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라고 얘기하는 것과 한가지이다. 앞뒤가 꽉 막힌 유생이 <논어> 달달 외고 공자님 만나 문답을 하다가 사람을 보아가며 똑같은 이치를 다르게 설명해주는 공자님보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모른다고 비판하는 격이다.

김영환은 자신이 밑줄 그어가며 달달 외운 주체사상 해설서나 논문을 생각하며, 김일성이 주체사상에 대해 모른다고 용감하게 말한 것이다. 김영환이 공부한 주체사상은 황장엽 등이 당의정을 입힌 주체사상이다. 자주성이니, 창조성이니, 의식성이니 하는 용어들이 그런 당의정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약을 보고 당의정만 기억해서 노란 약, 주황색 약 등등 색깔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색깔은 약의 본질과는 전혀 다르다. 황장엽 등 이론가의 역할은 약에 당의정을 입히고, 포장을 하고, 설명서를 단 것이지, 약을 만든 것이 아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잘못 알려진 황장엽의 역할은 당의정 입힌 정도로 수정되어야 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주체사상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의 건설 과정에서 교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북에서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사상 체계로 너무 뻥튀기하지 않고 하나의 삶의 태도로 설명했더라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버렸다. 강철 시절의 김영환에게 북은 남의 대안이자 ‘절대선’이었다. 항일 무장투쟁의 신화와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건설! 일제의 강점과 분단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요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노린내 나는 양키의 군홧발 아래” 짓밟힌 남녘에서 자란 세대에게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북은 이상향처럼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이라면 남쪽이 북에 비해 경제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그 격차가 오늘날처럼 비교할 수 없게 벌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현실정치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체제인 북을 ‘절대선’으로 본 것도 비극이지만, 김영환은 이런 잘못을 깨닫고는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수구세력의 품에 안긴 채로…. 그가 쓴 ‘강철서신’의 히트작 ‘간첩 박헌영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고 자란 세대는 “간첩 김영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주사파(注射派) 소동은 계속된다

남쪽이 민주화가 되고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마당에서 아직도 주사파 소동은 벌어지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사파도 한 가지 브랜드가 아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북의 체제 우위를 주장하는 주사파(主思派)는 이제 거의 멸종위기이다. 그런데도 주사파가 나타났다고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또 다른 주사파(酒邪派)로 분류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술 마시고 어쩌다 주사 부리는 것이라면 한숨 쉬며 참아줄 수 있겠다. 그런데 술 취하지도 않고 아무나 보고 주사파, 주사파 하고 주사를 부리니 참 더불어 살기 고약한 존재들이다. 더 악질적인 주사파는 주사(注射)를 맞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속된 말로 뽕쟁이라 하는 주사파(注射派)들이다. 제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무언가가 주입되어야만 움직이는 족속들, 약기운이 떨어지면 심한 금단현상을 보이는 부류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더니 주사파(主思派)와 주사파(酒邪派)가 만나 새로운 주사파(注射派)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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