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맹은?
1981년 11월 결성 당시 ´출범 선언문´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매진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데 이어 91년 12월 ´특별성명´ 제7호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제하로 당 건설 전략을 밝히는 등 출범이래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끈질기게 추진해 왔다.
사노맹의 성격
사노맹은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자칭하며 "전투 사령부"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의 무기"라고 주장하며 당의 사상은 사회주의를 핵심으로 하고 혁명전략은 반제-민족해방 혁명과 반파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당원 확보 대상은 공장에 부식된 혁명소조들을 근간으로 하여 빨치산 출신 장기수, ´남민전´ 등 간첩사건으로 복역하다 출소한 좌익수, 재야운동권의 사회주의 신봉자, 운동권 출신 복역자.해외 유학자 등이다.
사노맹의 임무
사노맹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하게 될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면임무 5개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계급의식화
둘째, 당의 핵심지도자 발굴과 혁명운동 진전을 위한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
셋째, 각계 각층으로부터 동조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동맹세력 획득
넷째, 자본주의 체제 철폐를 위한 노동자계급 등 민중의 혁명적 정치투쟁 지도
다섯째, 남한의 사회주의 진영의 강화를 위한 국제 사회주의 진영과 연대
사노맹은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조직 및 운영원칙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와 엄격한 규율을 특징으로 하는 공산당식 ´민주집중제´를 채택했다.(민주집중제 :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은 허용하되 결정된 정책과 노선에 대해서는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공산당 운영 원칙)
´당´ 건설 방법
사노맹은 대중 투쟁속에서 대중의 지지.보호를 받는 대중적 전위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면서 당 건설의 선결과제로 △사상적인 면에서 당 건설에 대한 전 좌익진영의 정치, 사상적 통일과 당 강령 제시 △조직적인 면에서 교수, 언론인, 남로당.통혁당 인사를 망라하여 혁명의 조직주체 확립 △물질적 측면에서 지속적이고 안정된 혁명활동을 수행할 비합법 진지 구축 및 재정적 기초확립을 제시했다.
사노맹은 빨치산의 후예
"사노맹은 각족 투쟁선언문을 통해 "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지리산과 태백산맥을 휘어돌며 미제국주의와 파쇼정치에 맞서 힘차게 투쟁할 때만 해도 반도의 남쪽땅에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통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끊겨 있던 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실날을 이어 사회주의 혁명투쟁에 살고 죽으려 한다"는 등 조직의 목표를 빨치산의 전통을 계승,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후 궁극적으로 북한과의 연대를 실현, 한반도를 공산화할 것임을 투쟁을 목표로 제시했다.
김일성을 ´통일주의자´, ´평화주의자´로 극찬
사노맹은 북한의 폐쇄적이고 비참한 사회실상을 외면한 채 조직원들에 대한 사상교양 등을 통해 "우리가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것처럼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을 숭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양반의 앞잡이였던 이순신, 민족주의자에 불과한 김구에 대한 교육은 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 등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식´에 의한 통일실현 주장
사노맹은 한반도의 통일실현에 있어 북한과의 연대는 당면 혁명 승리의 중요한 고리가 된다고 인식하고 북한이 대남적화실현을 위한 통일전선 공작 차원에서 끊임없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통일 정치협상회의´ 소집 등을 통해 연방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노맹은 학원을 어떻게 장악해왔나?
사노맹은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소위 노동자계급과 동맹관계에 있는 학생 운동조직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하에 사노맹 산하에 ´사회주의 학생 연구소´라는 비밀 지하조직을 두고 정예조직원을 양성, 학원가에 침투시켜 학생 혁명 전위조직인 ´전민학련´(전국 민주주의 학생연맹.JDSL)을 결성했다.
전민학련은 사노맹의 지령에 따라 전국 70여개 대학에 민학련(DSL)을 결성해 각 대학별로 ´투쟁결사대´를 조직, 학원가 집회는 물론 각종 정치집회와 노사분규 현장에 참여해 화염병 투척, 각목투쟁 등 무차별 폭력투쟁을 자행하는 한편 고교생까지도 혁명대열에 끌어들이기 위해 ´고등학생 정치활동 쟁취를 위한 공동실천 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사노맹의 소위 ´조직보위´ 실상 사노맹은 혁명적 사회주의자 조직이 전무한 ´반동의 땅´ 남한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강철같은 규율로 무장해야한다면서 ´선진 활동가의 10대 보위수칙´이라는 조직보위 지침을 제정, 생활화했다. 이들은 ´빨치산의 후예´답게 죽음으로써 사수한다는 결의 아래 청산가리 등을 이용한 자살용 독극물을 개발하고 비밀아지트에 가스총, 도검류 등을 상시 비치, 수사관들의 검거에 대비해왔을 뿐 아니라 음어.약어 사용, 무인포스트 운영 등 간첩조직을 능가하는 2중.3중의 보안장치를 마련하는 등 비밀활동을 생활화했다. 이들은 아지트 단위별로 ´비상시 긴급대피 계획´ 등을 마련하고 "적(수사기관)이 급습시 대적 방어조가 중심이 되어 가스총과 각목으로 대항한다", "격투틈을 이용, 핵심간부를 피신시키고 조직문건을 소각한다", "대피가 불가능할 경우 자결로 조직을 보호한다"는 등의 자체 보위원칙을 정하고 수사기관의 검거에 대비해왔다. 사노맹 주요 인물 박노해, 백태웅 정통 마르크시즘을 신봉하고 자신들의 주된 활동무대를 노동계로 생각했다.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박노해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었던 백태웅이라는 쌍두마차가 이론으로 무장되어 조직적으로 사노맹을 이끌었다. 제2의 남로당을 표방하고 노동자들의 혁명을 추구했다. 박노해의 본명은 박기평이다. 백태웅은 부산 동성고등학교와 서울 법대를 나왔고 아버지가 순경이었다. 학창시절 수배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자수를 하면 불구속으로 해준다고 경찰과 거래를 했는데, 그 약속이 경찰측으로부터 지켜지지 않고 구속이 되어버린다. 백태웅의 아버지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고 죽게 된다. 이에 92년 검거될 때까지 공산주의 활동을 더욱 가열차게 하게 된다. [출처] 공산혁명을 추구했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작성자 포청천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고, 詩人이며 버스 운전기사를 하기도 했다.
全南 함평 출신이며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
92년 사노맹 사건으로 검거 당시 옷은 거의 외제였고 많은 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 노동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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