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전우치(2009)

감독 최동훈│출연 강동원, 김윤석, 임수정, 유해진, 백윤식, 염정아
최동훈감독 스타일 매니아는 아니지만 전작들에 못 미친건 사실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재미있지 않았다. 영화보면서 딱 두번 웃었다. 유해진이 개 흉내낼 때..
영화가 재미만 추구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면, 새로울 것도 하나도 없었고 여배우들의 캐스팅마저 그저 그랬다. (별 캐릭터 없이 내조의 여왕 이후 남발되는)선우선이 등장해서 앗차 싶었는데 임수정은 그냥 역할자체도 밍숭밍숭하고 어울리지마저 않았다. 게다가 염정아의 극과도 오버연기는 그렇게 오버가 필요할 정도로 코믹한 분위기가 아닌데 이게 왠일인가 싶어 오글거려 죽을 뻔..
극을 이끌어나가는 중심 내용이 전우치의 철없음도 아니고, 두사부일체 정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한 사랑도 아닌게 돼버려 '그저 136분짜리 강동원 매력발산의 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께서 "전우치 봤어요? 와 이거 정말 너무 재밌는데" 라며 대화를 시도하시길래 "아 네.. 뭐 강동원이 연기는 잘하더.."까지 응답했을때 딱 말을 짜르시더니 "정말 이거 이런 한국영화를 많이 만들어야 돼. 남자가 봐도 멋있는데 여자들이 얼마나 좋았겠어. 강동원 말이야. 다들 강동원 볼라고 오는 거 아냐. 잘생겼지 돈많지 날씬하지 이건 뭐 blablabla.."
아 그래. 무슨 팬픽 무비처럼 강동원 볼라고 오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감독은 그런걸 원해서 만든게 아닌들, 나는 절대 그렇게 영화를 보러 다니지는 않은들.
암튼 요즘 트랜드 좇다가 가랑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주인공의 외모 빼고는 도라에몽 극장판이 훨씬 우월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평을 남기고 싶음)
2009년 12월 27일 일요일
8Mile(2002)

감독 커티스 핸슨│출연 에미넴, 킴 베신저, 브리트니 머피, 메키 피퍼
강호동과 이수근의 말도 안되는 랩배틀을 보다가 말도 안되게 8mile이 보고 싶어졌다.
신입생 때 화양리를 뒤덮었던 에미넴의 lose yourself 열풍이 갑자기 금단현상처럼 확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항상 무언가 조금씩 안타깝지만
이제는 브리트니 머피의 백치미를 그리워해야만 한다는 것도 안타깝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앤딩의 폭발은 최고다.
축 제26회 크리스마스
(부산행이 불발된ㅜ_ㅜ) 제26회 크리쓰마쓰 행사를 위해 눈보라를 뚫고 매우 늦은 밤 역삼으로 출동. 국민 대 이동이라도 한 듯 텅빈 1호선과 2호선에서 약간 무서움을 느꼈다.. 나빼고 모두 10시 퇴근이라 내가 장을 보고 있을까라고 제의를 했지만 "너무 무거워(너에게 장보기를 맡기기엔 불안하다. 너는 이마트를 통째로 털어올지도 몰라)"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는데 혜라이의 전승현님은 손자명 노는데 가서 장봐오라고 하라며 고맙게도 내 마음을 읽어주셨다. 아 완전 2012년에 혼자 살아남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쨌든 혜라이와 이마트로 출동하여 전세계 맥주를 다 사들고 뭔노무 버스가 밤 10시에 끊겨서 택시를 타고 교대 14번 출구로 흐꼼을 픽업하러 가면서 네네의 치즈맛 스윙치킨과 케잌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하다가(둘 다 사자고 조용히 의견을 피력한 거 빼고는 오늘은 장보는데 매우 협조적이었다는 후기를 남기고 싶다) 흐꼼을 마구 도발시켜 아슈크림케잌은 싫다는 혜라이의 의견은 박살낸채 써리원에서 아슈크림케잌 구매를 강요했다ㅎㅎ 그리고 나를 위해 크리스마스모자도 곱게 모셔왔다ㅎㅎ
으쌰으쌰 달려 주인장들의 불찰로 특실에서 하향조정된 우리의 일반룸에 ㅠㅜㅜ 도착!! 하자마자 케잌옵션 모자를 썼는데.. 이거슨 산다라박도 아니고 박봄 모자니까 너도 문제 없을꺼야 라던 흐꼼의 예상과 달리 내 두피를 벗겨내서 만든 듯 너무도 딱 맞아 곤란하고 더웠다..
하지만 벗으면 지는거다.
항상 트렌드의 궤도를 놓치지 않는 흐꼼에게 2PM을 배우고 한 대여섯명쯤 걱정해주고 나니 전 세계 맥주들과 와인 두 병이 다 내 뱃속에 들어와버렸어요. 우영이가 우엉이로 들릴 때 쯤 흐꼼의 제1차 넉다운.
혜라이랑 대한민국의 26세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심층토론을 5시 38분까지 하다가 스믈스멀 잠이 들었다.
12시 30분 모닝콜에 심장마비 일으킬 뻔하게 깨어나 여유롭게 컵라면 브런치를 하며 신동엽의 300을 보는데 집에 있으면 머리도 안감고 세수도 안한다는 약 200 여명의 여성들에 신동엽이 경악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난 이따 세수 안하고 집에 갈라고 했는데 하며 어의없어 했다가 세수를 강요받고 해가 중천에 뜬 거리로 나왔다. 던킨을 향해 가는데 교대의 명물 곱창집들이 즐비.. 눈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우리 방금 먹은 거 밥 아니냐며 스스로를 질책해야 했다. 하지만 던킨에서 나와 결국은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놀부 순대국집에서 순대맛 순대국+가래맛 막국수+사워크림맛 갈비탕을 영하 15도에서 먹고 하루 해가 다 저물어서야 귀가를 했다. 뒤풀이로 롯데월드 갈 뻔했는데 그것보다는 양호했음.
내년에는 쌍쌍파티를 추친하자꾸나
개리같은 스타일 괜찮겠어?ㅎㅎ
Up(2009)

감독 피트 닥터, 밥 피터슨│목소리 에드워드 애스너, 조단 나가이, 밥 피터슨, 크리스토퍼 플러머
지나가버린 어린시절에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꿈도 꾸었지
그리고 프레드릭슨 할아버지는 예쁜꿈을 이루셨네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2007)

감독 시드니 루멧│출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에단 호크, 마리사 토메이, 알버트 피니
뜨겁고 차갑고 뜨겁고 차가워서 욱신거린다.
2009년 12월 26일 토요일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그래 알고있어 지금 너에게 사랑은.. 피해야 할 두려움 이란 걸
불안한 듯 넌 물었지 사랑이 짙어지면 슬픔이 되는 걸 아느냐고
하지만 넌 모른거야 뜻 모를 그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걸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In The Valley Of Elah(2007)

감독 폴 해기스│출연 토미 리 존스, 샤를리즈 테론, 수잔 서렌든
어릴 적에는 이런 비극 애도물을 많이 좋아했었다. 배우도 스토리도 빠르게 희미해지지만 지구본 위에 구멍을 하나 더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구멍들이 너무 많아져서 지구본의 형태가 이그러져 버렸고 특히 아메리카대륙은 초박살 상태다. 나 또한 더 이상 포장지가 군데군데 붙어있는 사탕은 먹기가 거북스러워 말끔한 상태의 사탕이 아니고서야 반갑지도 않다.
반전 좋다. 더욱이 미국에서 들려오는 반전 목소리이니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까발리기가 좀 밋밋하다.
미국이 한 짓거리들을 이렇게 차분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어쨌거나 미국도 피해자라며,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개인의 문제로 결론지어가니 할 말이 없어서 짜증이 났다.
성악설은 없고 환경결정론만 가득한 이야기에 혼란이 온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개쉐끼집단이라는 나의 마인드에 혼란이..
이 영화가 제작 된 지 2년여가 훌쩍 넘었는데도 가시적인 변화는 전혀 못찾겠고, 노벨평화상 받더니 오바마마저 흡혈귀가 된 이 마당에 이게 르포나 반성문이 아닌 고도의 프로파간다물로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나. 내가 좀 격양되었다손 쳐도
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The Horribly Slow Murderer with the Extremely Inefficient Weapon(2008)

감독 리차드 게일│출연 폴 클레멘스, 마이클 제임스 카시
정작 부천에서는 시사실 눈팅만 천 번하고 위디스크에서 겓..
정말 죽을때까지 숟가락으로 패겠다는 치밀함이 레알 호러다
Sherlock Holmes(2009)


감독 가이 리치│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드 로, 레이첼 맥아담스, 마크 스트롱
가이 리치의 시리즈물이라..겔겔겔겔
내 두 훈남을 만날라고 개봉 첫 테입 끊었소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6시간톡크
DMZ만남 이후 2012벙개 실패 어느새 계절이 한 번 더 변해있었다.
백만인의 무한도전조차도 시청하지 않던 우리 희진언니가 화성인 바이러스와 남녀탐구생활에 이어 연애불변의 법칙까지 발을 디디셨다가 심하게 데이고 오셨다. 그런 슈레기만발 프로그램은 보지도 듣지도 말자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어쩌다 저쩌다 보니 3시반에 시작한 톡크가 9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이났다.
언제나처럼 언니와 얘기하고 나면 어정쩡한 20대의 치기어림이 다독거림을 받고 멋진 삶들을 만나게 되고 항상 기분이 좋다. 퐈이팅이다 크핫핫핫
일년내내 죽도록 일하다 연말에 시궁창으로 빠지는 우리들의 라이프는 다 조만간 대박나기 위한 과정일뿐이라고! 연말 즐겁고 활기차게 보내고 연초에 언니의 아트센터 입성에 발맞춰 삼청동 와인바 고고씽!
아무튼 오지게 추운 오늘 전철역 세정거장 이웃 희진언니와 즐거운 런디너 *^^*
한 두달 무지막지하게 놀았더니 동글동글 내 얼굴
모자이크 기능이 없어서 아쉽..
2009년 12월 14일 월요일
여배우들(2009)

감독 이재용│출연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디에디터스+연예가중계+무릎팍도사
그래도 예쁜 여배우들을 104분동안 보는 일이 그리 지겹지는 않았다.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Alfie(2004)

감독 찰스 샤이어│출연 주드 로, 마리사 토메이, 오마 엡스, 니아 롱



주드로가 매력없기도 쉽지 않은데..
재미없는 것보다 좀 더 심했다
영상이랑 색감은 딱 내취향인데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그 때 불쑥 내 눈 앞에 나타나 나는 연애소설입니다. 라고 말했다.
2년 전 쯔음부터 항상 예스24 장바구니에 담겨있는 채로 오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져 왔다.
연애소설은 필요 이상의 감정소모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여 황경신의 <모두에게 해피앤딩> 이후로 끊었던. 처음 읽는 가벼운, 장편, 연애 이야기.
양장껍데기 뒷편에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라고 씌어있다.
위험한 발상.
우리의 사랑은 없다. 하물며 타인의 사랑이라고.
내 사랑만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랑이 무사해서 내 사랑이 위험해질 수가 있다.
한 백여장을 읽으니 이것도 연애소설의 클리셰일 뿐이다.
그래도 이거 읽느라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다.
인생, 사랑 다 뻔한데 그래도 항상 흥미진진하잖아. 그리고 약간의 대리만족..
The Straight story(1999)

감독 데이빗 린치│출연 리차드 판스워드, 씨씨 스페이식, 해리 딘 스탠든, 제인 갤로웨이
사는 모습은 다들 귀엽다.
다들 귀여워.
앞으로는 어의없고 황당해도 그냥 귀엽다하자 귀여우니까.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Kill Bill : Vol.1(2003)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출연 우마 서먼, 루시 리우, 비비카 A. 폭스, 마이클 매드슨

나도 모르게 자꾸 얼굴을 닦아냈다. 손에 피가 흥건히 묻어 나올 것만 같아서 ㅎㅎ
데쓰노트가 적고 싶을때마다 봐줘야겠군. 댕강댕강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이 노래
내가 듣던 음악을 네가 듣고 내가 듣던 음악은 너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고
네가 듣던 음악을 내가 듣고 네가 듣던 음악은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고
그런 너와 나의 음악들은 이제 완전히 멈춰 버렸다
우리는 이제 지구를 거꾸로 돌고 있으니 결코 다시는 서로에게 들려 줄 수 없겠지
좋은 음악을 들으니 네가 또 어김없이 생각이 나
하지만 이젠 너를 위한 것들이 아니야..
2009년 12월 6일 일요일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대한민국 공화국 변천사
공화국은 헌법개정이 아니라 헌법상 대통령제인가 아니면 내각제인가 또는 대통령제라도 대통령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1공화국에서 2번의 개헌이 있었고 3차개헌에 의하여 내각제(2공화국), 2공화국 시절 1번의 개헌 5차개헌에 의하여 대통령제(3공화국), 3공화국 시절 1번의 개헌이 있었고 7차개헌에 의하여 유신정권(4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개정에 따라 공화국 명칭을 붙인다고 하면 어패가 있다.
- 1공화국 순수한 미국식 대통령제. 3권분립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체제이며 이 당시에 2번의 개헌(발췌,4사5입)이 있었다.
- 2공화국 내각제(국무총리가 내각수반). 4.19 이후 대통령제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독재를 피하기 위하여 내각제를 선택했다고 보면 됨.이 시기에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인물등을 처벌하기 위한 별도의 헌법개정이 있었다.
- 3공화국 대통령제로 환원. 5.16 이후 박정희에 의한 대통령제로 이 시기에 또 박통의 3선을 위한 3선개헌이 있었다.
- 4공화국 영도적 대통령제. 대통령제이면서 대통령이 입법,사법부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는 대통령제로 유신헌법하의 대통령
- 5공화국 우월한 위치의 대통령제. 유신헌법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강력한 힘을 보유했던 대통령제. 전두환시절
- 6공화국 대통령제. 3권이 균등한 힘을 가지는 대통령제
제 6공화국 이후에 공화국이 변천하지 않는 이유는 개헌시 공화국의 명칭이 바뀌는게 원칙인데 마지막 개헌이 노태우대통령때였고 지금까지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금은 제 6공화국인 것이다.
제1공화국 이승만대통령(1~3대) 1948-1960
제2공화국 윤보선대통령(4대) 1960-1962
제3공화국 박정희대통령(5~9대) 1963-1979
제4공화국 최규하대통령(10대) 1979-1980
제5공화국 전두환대통령(11~12대) 1981-1988
제6공화국 노태우대통령(13대) 1988-1993
김영삼대통령(14대) 1993-1998
김대중대통령(15대) 1998-2003
노무현대통령(16대) 2003-2008
이명박대통령(17대) 2008-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그리하겠다며
세상이 이리도 변하고 사람들도 그리도 변하고 있는데 나만 코끼리 코 돌기 하고 있을 순 없지 않냐며
이천십년 쌍코피 줄줄 세상은 넓다 프로젝트로 후회없이 살고
그래도 안되면 정말 내년에는 모든 외로움을 감수하고 외쿡으로 떠나버리겠다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어서라도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겠다며
어흫흫 아자자
아 정말 난 모세혈관까지 대한민국 체질인데ㅜㅜ
시발스러워
새벽까지 쪽잠을 자며 한마리라도 더 닭을 팔려는 세 아이의 어머니
그녀의 손과 얼굴이 거칠어질수록, 빨갛게 눈이 충혈될 수록 어째 빚만 더 늘어날 뿐이다.
그놈의 삽질이 퍼 담을 줄도 좀 알면 좋으련만
역행하는 세상 속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참으로 허망하게 느껴져 잠이 안온다
아 정말 시발스럽다
2009년 12월 3일 목요일
<한홍구>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
요즈음 신문을 보면 혹시 시계가 10년쯤 거꾸로 돌아가 1994년 여름의 주사파 소동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중앙일보>는 김일성방송대학이 이미 5년 전에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것을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북 주체사상 인터넷 공습’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11월11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이에 뒤질세라 다음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70여일 전에 조합원들을 상대로 개최한 공무원노동자학교 교육 내용에 주체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들어 공무원노조의 조합원 교육에 주체사상이 포함되었다며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5년 전에 시작한 인터넷 강의도, 70여일 전에 100명도 안 되는 조합원 모아놓고 행한 교육 내용도 대한민국의 일등신문 자리를 놓고 피말리는 경쟁을 하는 두 거대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올려놓다니, 참으로 놀라워라, 주체사상의 괴력이여!
박홍, 해프닝의 추억!
10년 전, 북의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조문 파동이 벌어지더니, 곧이어 주사파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당국은 일부 대학에 설치된 김일성 주석 분향소를 철거하고 학생들을 구속했다. 이 일로 이른바 ‘북핵 위기’를 지나 정상회담 일보 직전까지 갔던 남북 관계는 김영삼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에 한명의 스타가 다시 등장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출신에 서강대 총장으로 있던 신부 박홍,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당시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여 전대미문의 ‘유서대필’ 사건을 초래한 바로 그 인물이 다시 험한 입을 열었다.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 돌아온 것이다.
박홍은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초청 오찬에서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되어 있다면서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얼마 뒤 그는 “북한에 초청되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남한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발언을 했고, 몇몇 교수들은 공안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홍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연일 주사파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박홍의 입을 쳐다보기는 언론만이 아니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을 꼭 극장에 가야 볼 수 있지는 않았다. 마치 박홍이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인 듯 그의 말 한마디에 주사파 사냥의 화살은 과녁을 옮겨다녔다.
제자인 학생들을 주사파로 고발한 ‘스승’은 <조선일보>에 의해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 신문은 한 면을 털어 사회가 그의 용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각계 ‘지식인’들의 동조발언을 실었다. 그런데 이 용기 있는 신부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연일 쏟아내는 놀라운 주장들의 ‘증거’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박홍은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조선일보>의 한 논객은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박홍의 발언을 놓고 “일부의 인사는 증거를 대라고 추궁”하는데 “증거 요구는 망발”이며 “천치가 아닌 한 누구도 물증을 고스란히 모두 남겨놓으면서 혁명운동을 꾸미지는 않는다”고까지 주장했다.
주사파의 뒤에는 사노맹이 있다는 말에 가장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아마도 사노맹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90년 안기부에 의해 일제 검거된 사노맹은 남쪽의 운동 진영에서 친북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사파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반대하는 그룹으로서 주사파들과 첨예한 사상투쟁을 전개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정통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북이나 주체사상을 사회주의를 벗어난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편향이라고 비난해왔다. 그냥 비난해온 정도가 아니라 남쪽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주사파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집단이 사노맹이었다.
사노맹은 억울하다?
그런데 졸지에 사노맹이란 이름이 북의 청년단체인 사로청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이 혐오하는 주사파의 배후이자, 사로청의 지시를 받는, 말하자면 남쪽의 주사파를 북과 연결해주는 고리로 지목되었으니 그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노맹이 주사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점은 민족민주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명칭이 비슷하다고 이렇게 연결지어 놓은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조선일보>의 평가가 100% 잘못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만큼은 확실했다. 애들 잘 쓰는 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더라만….
남쪽에 주체사상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85년 말부터이다. 일부 학생들이 북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방송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북의 주체사상을 방송을 통해 받아들이기까지 남쪽의 민족민주운동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1970년대 후반에는 남미의 상황을 설명하는 종속이론이 수입되어 꽤나 유행했다. 그러나 머나먼 남미의 종속이론은 아무래도 우리 처지와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웃한 중국혁명의 경험에서 마오쩌둥의 사상과 혁명이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마오의 이론은 다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통이론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레닌에 이어 사람들은 스탈린을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원전(原典)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원전 속에 저 광주의 학살자를 몰아내는, 모순에 찬 자본주의를 일거에 해결하는 비법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몇번씩 복사해서 글자가 뭉개진 책을 몰래 돌려보았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타자를 쳐서 복사한 아주 조잡하게 번역된 원전들의 한국어판이 돌기 시작했다.
원전의 공부도, 사회과학 공부도 역사가 길지 않았다. 현대사 연구는 광주를 거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놀라운 학구열과 첨예한 의식을 가진 어린 학생들, 그러나 복잡한 세상은 희미한 원전 복사본에 사회과학 서적 몇권 읽은 지식으로 분석하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누가 해주지 않는 작업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 사회 내부의 계급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과의 문제 또는 북과의 통일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는가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채 소화되지 않은 이론과 지식으로 얽히고설킨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니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말도 글도 너무 어려워졌다. 글 쓴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는데,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사람들은 생경한 사회분석을 그대로 조직론과 실천론에 적용하고 그것을 과학이라 믿었다. 논쟁 판에는 이미 머리에 쥐가 난 사람들과 곧 나려는 사람들 두 부류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속이론을 지나 레닌을 건너…
주체사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주체사상이 남쪽에서 일거에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우선 쉬웠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사회구성체 논쟁에 질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단순명쾌하게 풀어버리는 주체사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든 것은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약어)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의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번잡할 대로 번잡해진 사회구성체 논쟁과는 달리 이제 ‘고민 끝, 실천 시작’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서구의 신좌파에서 남미의 종속이론을 거쳐 중국의 마오이즘을 지나 마르크스를 만나고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볼셰비즘으로의 긴 여정 끝에 사람들은 마침내 원산지가 조선임을 주장하는 주체사상을 만난 것이다. 이제 번역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번역의 시대가 종식되었다는 것이 곧 남쪽 운동 진영이 정말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기 얘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번역의 시대보다 더 어두운 ‘받아쓰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받아쓰기의 시대는 화려하게 개막되었다. ‘강철’이란 서명에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은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널리 퍼져갔다. ‘강철서신’은 마치 무협지에서 새로운 고수가 강호를 평정하듯 새로운 신화를 낳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활동가의 품성을 강조했다. 이론만이 남아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던 당시의 풍토에서 사람냄새 물씬 나는 품성에 대한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철서신’에서 미국은 미국놈도, 미제도 아니었다. ‘노린내 나는 양키’였고, 각을 떠도 시원찮을 존재였다.
나는 이 무렵 스칼라피노,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번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주요 연설문을 비롯하여 북에서 나온 각종 서적이나 문헌들을 이미 많이 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강철서신’의 출현은 북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펴는 집단이 남쪽의 운동 진영 내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내게는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북의 원전을 이미 본 입장에서 볼 때 강철의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북의 원전을 접할 길이 없었던 일반 청년학생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강철 김영환은 사상의 불모지였던 남쪽에 주체사상을 꽃피운 자생적 주체주의자로 추앙되고 있었다. 이것은 남쪽의 운동 진영을 위해서도, 김영환 본인을 위해서도, 주체사상을 위해서도 크나큰 불행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김영환의 착각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1999년, 김영환은 강철이 아니라 간첩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밀입북하여 김일성까지 만난 남쪽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 이전의 조직 사건에서 조작과 침소봉대라는 의혹을 받던 국정원은 이 사건의 경우 축소 수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김영환을 공소 보류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강철 김영환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반성문을 국정원에서 작성했고, <조선일보>는 주사파 대부의 반성문을 특종 보도했다.
이 무렵 김영환이 <신동아>와 한 인터뷰를 보면 기가 막히도록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김일성을 직접 만난 김영환의 평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가 만나서 얘기해본 바에 의하면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만 꺼냈지 실제로 김일성이 하는 얘기에는 주체사상의 내용이 녹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혀 없었어요.” 얼치기 신학생이 예수님 만나 몇 마디 대화 나누고 ‘기독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라고 얘기하는 것과 한가지이다. 앞뒤가 꽉 막힌 유생이 <논어> 달달 외고 공자님 만나 문답을 하다가 사람을 보아가며 똑같은 이치를 다르게 설명해주는 공자님보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모른다고 비판하는 격이다.
김영환은 자신이 밑줄 그어가며 달달 외운 주체사상 해설서나 논문을 생각하며, 김일성이 주체사상에 대해 모른다고 용감하게 말한 것이다. 김영환이 공부한 주체사상은 황장엽 등이 당의정을 입힌 주체사상이다. 자주성이니, 창조성이니, 의식성이니 하는 용어들이 그런 당의정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약을 보고 당의정만 기억해서 노란 약, 주황색 약 등등 색깔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색깔은 약의 본질과는 전혀 다르다. 황장엽 등 이론가의 역할은 약에 당의정을 입히고, 포장을 하고, 설명서를 단 것이지, 약을 만든 것이 아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잘못 알려진 황장엽의 역할은 당의정 입힌 정도로 수정되어야 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주체사상은 항일 무장투쟁과 이북의 건설 과정에서 교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북에서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사상 체계로 너무 뻥튀기하지 않고 하나의 삶의 태도로 설명했더라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버렸다. 강철 시절의 김영환에게 북은 남의 대안이자 ‘절대선’이었다. 항일 무장투쟁의 신화와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건설! 일제의 강점과 분단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요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노린내 나는 양키의 군홧발 아래” 짓밟힌 남녘에서 자란 세대에게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북은 이상향처럼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이라면 남쪽이 북에 비해 경제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그 격차가 오늘날처럼 비교할 수 없게 벌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현실정치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체제인 북을 ‘절대선’으로 본 것도 비극이지만, 김영환은 이런 잘못을 깨닫고는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수구세력의 품에 안긴 채로…. 그가 쓴 ‘강철서신’의 히트작 ‘간첩 박헌영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고 자란 세대는 “간첩 김영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주사파(注射派) 소동은 계속된다
남쪽이 민주화가 되고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마당에서 아직도 주사파 소동은 벌어지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사파도 한 가지 브랜드가 아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북의 체제 우위를 주장하는 주사파(主思派)는 이제 거의 멸종위기이다. 그런데도 주사파가 나타났다고 소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또 다른 주사파(酒邪派)로 분류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술 마시고 어쩌다 주사 부리는 것이라면 한숨 쉬며 참아줄 수 있겠다. 그런데 술 취하지도 않고 아무나 보고 주사파, 주사파 하고 주사를 부리니 참 더불어 살기 고약한 존재들이다. 더 악질적인 주사파는 주사(注射)를 맞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속된 말로 뽕쟁이라 하는 주사파(注射派)들이다. 제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무언가가 주입되어야만 움직이는 족속들, 약기운이 떨어지면 심한 금단현상을 보이는 부류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더니 주사파(主思派)와 주사파(酒邪派)가 만나 새로운 주사파(注射派)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겨레21>
<한홍구> 뉴라이트는 '품성'을 갖춰라
광주의 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대학가는 수백명의 동포를 학살한 자가 대통령으로 거들먹거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학생들은 학살의 원흉을 끌어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종속이론에서부터 일본의 강단 마르크시스트들이 쓴 여러 가지 책이며, 마오쩌뚱의 사상이며, 레닌의 이론이며, 스탈린의 교과서까지…. 그리고 주체사상마저 들어왔다.
사실 이런 이론들은 입시 준비에 찌들어 변변한 인문교양서를 읽을 틈도 없이 사춘기를 보낸 대학생들에게는, 전문가인 교수들이 강의실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충분히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공군사 독재 아래서, 학보에 실을 원고에 ‘계급’이란 말만 써도 모조리 ‘계층’으로 고쳐놓는 교수님이 계신 대학가에서 이런 수입 혁명이론들은 정상적인 유통경로를 거칠 수 없었다. 이른바 386 세대의 학생들은 1년 전에는 똑같이 아무것도 몰랐던 선배가 거칠게 한두번 씹어준 이론을 자취방에서 벌어진 세미나에서 받아먹었다. 그런 소화되지 못한 이론조차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70년대 세대들은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눈빛이 달라진 후배들이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론으로 무장하는 것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경외감이나 어쩌면 부러움을 갖고 바라보았다.
1980년대는 사상의 시대였다. 그러나 미숙한 시대였다. 모두들 사상이, 세계관이, 철학적 입장이 중요하다고 거품을 물었지만, 정작 사상의 내용은 채우지 못한 그런 시대였다. 그래도 사상은 중요했다. 저 강력한 군사독재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면 사상적 준비가 필요했고, 대열의 사상적 통일과 단결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실무적인 일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에서도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사상적 입장이나 세계관이 달라서 그렇다며, 몇달씩 변증법적 유물론을 공부하자고 계획을 잡는 것도 별로 낯선 일이 아니었다. 뭐든지 변증법을 끌어다가 설명하려 들던 그 시절에 변증법, 참 여러 군데서 고생 많았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사상투쟁이나 사상운동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던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 그 시절 사투(사상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머리로든 발로든 운동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정말 오랜만에 사상운동이란 말을 다시 들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말을 다시 살려낸 사람들은 이른바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나선 이들. 수구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그들은 “노무현 정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사상을 생산하고 확대하는 ‘사상운동’이 필요하고도 긴급”하다며, “사회 곳곳에 자유주의 진지를 구축하고 자유주의를 시대담론으로 만드는 사상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뉴 라이트 운동 관계자들은 이 운동이 현실정치와 어떤 관련을 맺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사상운동이 성공하면 현실정치에 참여할 시점이 올 수도 있다”고 답했다. 20대 시절, 눈 동그랗게 뜨고 사상투쟁 하자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나이 40이 넘어서도 역시 눈 부릅뜨고 사상투쟁 하자고 하는 것이다.
뉴 라이트가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새롭기에 이름에다 ‘뉴’를 달고 나왔을까?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비판해대는 ‘수구 보수’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저 유명한 김용갑 의원이 “뉴 라이트의 주장이 바로 내 주장”이라고 반색을 하고 나올 정도로 뉴 라이트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두드러진 차이는 하나,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나선 ‘자유주의연대’라는 단체의 주요 간부들이 이른바 386 운동권, 그것도 말 많고 탈 많은 주사파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제 그들이 40대가 되어 자신들은 더 이상 운동권 386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자유주의 486’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10년간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골방에서 열심히 10년간 연구개발해서 들고 나온 모델이 486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 세상은 펜티엄급도 머잖아 낡은 모델이 될 정도로 확확 변하고 있는데.
이들 486을 불러낸 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이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 칼럼은 “‘주사파 386’의 약점과 정체를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들의 천적(天敵)”인 ‘자유주의 486’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물으면 ‘색깔론’이라고 길길이 뛰면서도 남을 향해서는 걸핏하면 ‘보수꼴통’ ‘수구냉전’이라며 ‘역(逆) 색깔론’을 펴는 ‘주사파 386’들의 아킬레스건에 ‘예리한 비수를 던져야 한다”는 격문을 썼다. 이 격문은 “전함 12척은 분명히 남아 있다”라는 결연한 말로 끝을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해직된 사이, 134척의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되어 겨우 12척의 배만 남았다.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 그는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있고 미천한 신도 죽지 않았습니다”(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을 인용한 이 글은 1980년대 뉴 라이트 중심인물들이 주사파로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 국책연구기관의 어느 교수가 자못 비장하게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격문을 날린 이래, 그 동네 최고의 명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수구의 항구에 가보니 배야 12척이 아니라 100척도 넘게 남아 있다. 문제는 배가 없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이 없다. 아니, 이순신을 만들어낸 민중의 아픔과 희망이 수구의 진영에는 처음부터 없었다.
무엇보다 뉴 라이트들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극단적이다. 1980년대에는 너무 쉽게 사회주의자가 되고 너무 쉽게 주사파가 되었다면, 지금은 너무 쉽게 뉴 라이트가 되었다. 사실 이들이 주체사상을 들고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주체사상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였다. 당시 운동 진영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북을 때려잡아야 할 ‘북괴’가 아니라 함께 통일을 이루어야 할 민족의 절반으로, 새롭게 사귀어야 할 친구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뉴 라이트들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들에게 북은 새롭게 사귀어야 할 벗도, 오랫동안 갈라졌던 형제도 아니었다. 뉴 라이트들이 핵심을 이룬 주사파들은 북을 이남의 혁명까지 지도해야 할 지도부로 섬겼다. 그들은 수령론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며, 민족자주와 통일의 과제를 폭넓게 끌어안는 집단 내에서 사상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수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이 참된 운동가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들이댔다. 그리고 ‘위수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나 ‘친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생신’이 오면 탄신을 ‘경하’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가서, 너무 조급하고 교조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하는 짓은 똑같다. 나이로는 불혹의 40대에 접어들었고, 사상적으로는 전향을 했다지만, 하는 짓은 똑같다. 다만 그때는 왼쪽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지금은 오른쪽으로 치달아 놀라게 하고 있다. 그 시절 운동 진영에서 잘 쓰던 말에 ‘소아병’이란 말이 있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극단적인 언행만 일삼는 미성숙한 태도를 야유하는 말이다. 주입식 교육에 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던 20대 시절에 이 돌림병에 걸리는 것은 어쩌면 통과의례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나이에 책임을 져야 할 40대에 이르러서도 그 병을 앓고 있다니 참 딱한 노릇이다.
새 모자를 갈아쓰고 새 장갑을 갈아끼듯, 그들은 주체사상을 버리고 자유주의를 선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사상을 중시해서, 삐꺽하면 사상투쟁을 벌이고 사상운동을 하자는 자들이 사상을 부속품 갈아끼듯 바꿔치기하는 모습은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상의 숙성과 내면화를 거치지 않고 이렇게 부속품을 갈아끼우듯 하는 것이야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일는지 모르지만, 제발 그런 걸 전향이라고 남들에게까지 강요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북을 수령으로 떠받들며 북의 방송을 받아쓰기-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받아쓰기, 맞춤법 엄청 틀렸다- 해서 열심히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더니만,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옛날에 주사파로 활약해서 잘 아는데 과거 학생 운동권의 다수는 주사파였고, 요즘 정권에 진출한 386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떠들고 있다. 즉, 자기네가 열심히 만들어 뿌려댄 유인물을 받아 읽은 사람들을 지금 주사파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처럼 미친 X 널 뛰듯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힘껏 내달려가 과거에 알던 누군가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전향이 아니란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한번의 큰 좌절을 겪었을 텐데,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독선적인 태도와 승리에 대한 확신만큼은 변함없이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 동네에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는 금지곡임에 틀림없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기에 “우리는 진실과 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한다”고 마구 떠들어댈까? 그들이 20대일 때는 마치 거짓과 반지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좌절했다는 것일까? 공안기관의 밀실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전향에서 우리는 깊은 반성과 좌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한쪽으로 돌진하다가 쾅 머리를 들이박고는 “이쪽이 아닌가벼” 하며 또 반대쪽으로 달려간다. 더 빨리 달려간다. 그러면서 자신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아온 386 세대들은 “속성 재배로 인한 심각한 지적 빈곤”에 빠져 있으며, “386 자신을 선이며 도덕적 가치로 확신하는 황당함”은 바로 이런 속성 재배와 지적 빈곤의 산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과거의 386들에게 이런 속성이 있었다면, 그런 특징을 가장 많이 가진 부류는 주사파였고, 주사파 내에서도 바로 그들이었다. 20년 세월이 흘러 아직도 그런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뉴 라이트들이다. 그들과 함께 운동을 했던 한 사람은 자신이 오히려 “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냐고 그들에게 따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뉴 라이트를 자처하는 주사파들의 변치 않은 점은 언제나 자기들이 각광을 받으며 무엇인가가 되고자 했다는 점이다. 단 한번도 노동의 땀방울로 밥을 벌어먹은 적이 없는 처지에 노동운동을 지도하겠다고 나서고, 노동운동가를 자처하며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문건을 만들어 배포하고, ‘사상적 지도자’인 자신들은 공장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지도’를 받는 동료와 후배들을 서슴없이 공장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 시대의 사상적 지도자를 자처하며 일대 사상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선다. 1980년대는 전두환 같은 자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에, 단 한번도 제 몸을 놀려 노동의 의미를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자들이 노동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실제 노동운동을 하던 일부 활동가들도 그들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런 시대였다. 그들이 한때나마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살인마 전두환이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사람들, 갈라진 조국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었던 활동가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뉴 라이트 뒤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다. 오로지 두 차례의 대선 패배로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감에 휩싸인 수구만이 있을 뿐이다.
뉴 라이트가 각광을 받는 꼴을 보면서 서글퍼지는 것은 그들이 딱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설치는 바람에 진짜 합리적인 보수세력의 출현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뒤 얼마 되지 않았던 2001년 여름에 나는 진작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은 똥과 된장만큼 차이가 난다며, 보수세력 스스로 수구와 결별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2001년 8월8일자, 제371호) 또 지난 탄핵 사태 때도 혼자서 “돌격 앞으로!” 하고 뛰쳐나갔다가 고립돼버린 수구세력을 분리 수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구세력은 분리 수거되지 않았다. 대신 뉴 라이트라는 새 피를 수혈받았는데, 이들 뉴 라이트는 자유주의라는 장식품만 들고 나왔을 뿐 그 행각은 수구세력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수구세력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는 뉴 라이트 같은 부류가 설쳐대며 물을 흐려놓을수록 한국 사회의 진로에 대해 진짜 보수적인 대안을 제시할 만한 합리적이고 차분한 집단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을 하는 김용한 박사의 ‘침 뱉기’ 비유를 빌리면 뉴 라이트는 여러 명이 같이 먹으려고 마련한 큰 비빔밥 그릇에 침 뱉는 짓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침을 뱉으면 보통 사람들은 더러워서 숟가락을 놓을 수밖에 없고, 결국 비빔밥은 침 뱉은 놈이나 침 뱉은 밥도 먹을 수 있는 막강한 비위를 가진 자들만의 몫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뉴 라이트마냥 남의 등에 칼을 꽂아야 행동하는 보수 지성으로 찬양을 받는 세상이니, 등 뒤에 칼 꽂는 짓 대신 정책과 대안으로 승부를 해보려는 차분한 보수 지식인들이야 어디에 설 수 있을까?
뉴 라이트나 나나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고,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할 수 있다. 젊은 독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나이 타령을 좀 해야겠다. 본격적으로 나이 먹어가기 시작하니까 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좀 달라지는 것이 감지된다. 80년대의 질풍노도 시대를 살아온 나 역시 한때 이념과 사상을 중시했다. 광주에 대한 태도, 미국에 대한 입장,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했다. 뉴 라이트들마냥 ‘위수동’ ‘친지동’ 탄신을 챙기는 짓은 안 했어도, 북에 대한 입장은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별로 나이 많지도 않은 40대에 들어서도 운동의 현장에 남아서 작은 일이라도 거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살아오면서, 또 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아니면 그놈의 정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상이나 이념, 너무 절대화하지 말자. 어디 전태일이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일까?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희한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뉴 라이트를 보면서 자꾸 드는 생각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이 결코 이념 때문에 벌어진 논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대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 40을 넘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다. 좌파 중에도 절대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생각은 보수적이지만 도저한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우파도 있다. 자신들이야말로 지금도 진짜 주체사상파라고 우기는 뉴 라이트들을 위해 주체사상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품성’이 중요한 것이다. 뉴 라이트들이 옛 동료들을 향해 사상 고백을 하라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뉴 라이트 문제,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사상식으로 얘기하면 품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일상의 말로 바꾼다면 ‘싸가지’ 문제일 뿐이다.
<한겨레21>
2009년 12월 2일 수요일
잉여잉여잉여
잉여게이지 폭발
하루만에 미드를 시즌 세개나 클리어하고 현관문 밖으로 1초도 안나간지 약 40시간째임
간지나는ㅜㅜ2010년 재수생모드를 위한 잉여게이지마저 차고 넘친다-_-
어제 채널 파도타기에서 올리브티비의 클로저가 걸려 의식적으로 돌려버렸는데 결국 오늘 파토타기에 걸린 XTM의 클로저는 다봤다. 주드로와 나탈리포트만의 대사는 돌돌이도 외울 지경인데 또 봤다. 카우치포테이토의 결말은 비극이다.. 내일은 CGV의 클로저를 보고 있을지도..
내일부터 이번주 주말까지는 알람에 맞춰 눈뜨고 바로 머리 감고 집을 벗어나는 바이오리듬을 구축하고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부할꺼닷
최측근들과의 망년회와 메리크리스마스 밀월여행을 위해 12월초는 도서관과 영상자료원에 반납하겠스므이다. 일단 오늘부터 라천을 끊고 자정전에 잠을 들자
잉여탈출!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바람(2009)
감독 이성한│출연 정우, 양기원, 손호준, 권재현
나는 영화가 좋다. 그래서 매일 영화를 본다.
오늘은 미장센을, 네러티브를, 영상 미를, 감독의 의도를 머리 깨지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내가 2차 시험에다 써놓은 순박한 답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김정국(정우의 본명)의 자전적 이야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누군가의 혹평에 난 반기를 들고 싶다. 사람들 저마다에게 수천가지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전문가들의 개인적인 평과 느낌으로 세뇌시키려는 듯한 단호한 평론으로 획일화 시키는 건 말도 안된다.
모든 것에는 여지라는 것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바람>은 동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써 매우 즐거운 영화였고 정우라는 배우의 매력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건 아니다.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변질된 Jose Cuervo Party!
11/29 모임의 목적은 조선생님의 임용시험 노고치하 및 성권이 여자친구와의 첫 만남이었으나 결국은 모든 것이 변질되었으며 삼만칠천원짜리 호세님을 모시러 간 신림동행 마저도 변질-_-
옆으로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간의 존재를 느낀 JP님의 금주 감행과 원래 간이 술용으로 제작되어있지 않은 조선생님의 더블 압박으로 따자따자 호세가 물거품 되어 또 목적지를 상실했다. 나는 홍일점이나 별로 홍일점스럽지 않은 강력한 형제의 포쓰를 발산하며 심지어 그들보다 더 안섬세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장소초이스에서 버퍼링이 짱이다. 학창시절 맨날 앗백 어대공점이나 강남역 빕스따위를 전전하며 맛없는 추억만 적립했던 풰밀리레스토랑으로 또 가야할 것만 같은 어두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는 할렘신림에다가 데낄라용 드레스코드로 나간 나와 결혼식 드레스코드 JP님 덕분에 순대따위는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결국은 또 맛대가리 없는 거 뻔히 알면서도 이동하기 귀찮고 해서 빕스 봉천역점에 입성했다 ㅠㅠ
세상에서 제일 맛없고 조그만데 비싼 빕스스테이크를 룡오빠의 해맑은 개그로 위로받으며 씹어주고 나왔다. 3개월치 곗돈이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ㅎㅎㅎㅎㅎㅎ 12월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계를 시작하고자 한푼도 남김없이 싹싹 쓰자며 하이에나처럼 PC방을 찾아들어가 성권이로부터 넥슨의 야심작 에어라이더를 배우기로 했다. 한 10분배우다가 3차원 조작은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다며 다들 로그아웃 마음의 고향 카트라이더 로그인ㅋㅋ 에어라이더의 신인 정성권은 카트라이더는 조빱이었다 세상에 루키라니.
아무튼 스피드원판+룡나라+송고니 VS 진병걸+돌돌이멍멍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마음은 신입생인데 아 몸은 빼도박도 못하는 평균연령 26.6세 임을 카트를 2시간도 못타는 저질체력으로 확인했다.
라스트는 콜드스톤으로 장식하려 했으나 강북권 2인의 막차 임박에 망년회로 미루고 해산.
망년회는 무조건 JP브라더의 간기능이 회복 된 후로 잡아서 호세님을 모시러 가야겠다.
이번에도 체계적이지 못한ㅎ 즐거운 시간이었음.
미장센(연출)과 네러티브
영화의 내러티브
미장센의 요소
미장센(mise-en-scene)이란 무엇인가요? 낯선 용어는 아닐 겁니다. 지금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머리 염색약의 상표명도 '미장센'입니다. 왜 그러한 이름을 붙였을까요? 아마 미장센이란 말이 무언가를 꾸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듯 합니다. 본래 프랑스어로 연극에서 액션을 무대화하는 것을 가리켰던 미장센이라는 용어가 영화에도 도입되면서 전체적인 모양새와 시각적 디자인을 나타내는 용어로 정착이 된 것이지요. 미장센은 카메라 앞에 배치되어 촬영되는 모든 요소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세트, 의상, 배우의 연기, 소도구, 조명 그리고 색채 등이 모두 들어갑니다. 요컨대 영화의 프레임 속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독의 통제를 지칭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미장센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미장센의 핵심 요소인 프레임(frame)과 구성(composition)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영화를 비롯한 시각예술은 어떤 형태로든지 프레임이라는 일정한 틀 내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연극의 경우 객석과 분리된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의 프레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주어진 영역 내에서 모든 연기가 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연극 연출가가 이 주어진 3차원적 공간에 배우의 동선(動線)을 어떻게 그려나가고 또한 소도구는 어떻게 배치할까 고려한데서 유래된 개념이 바로 미장센이지요. 즉 사람(배우)과 사물(세트)의 적절한 배치가 미장센의 관건이었던 거지요. 물론 영화의 프레임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현실의 3차원적 공간이 스크린으로 옮겨질 경우 필연적으로 2차원적 영상으로 치환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프레임은 회화의 프레임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회화의 캔버스의 경우는 세로의 비율이 더 큰 프레임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로의 비율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영상 이미지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요. 말하자면 회화에서 정물화의 경우는 세로의 비율이 큰 캔버스를 사용하고 풍경화를 그릴 때는 가로 비율이 큰 캔버스를 사용해서 적절한 효과를 낼 수가 있지만 영화의 경우 프레임 선택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모든 영상은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 프레임의 경계를 기준으로 하여 현실세계와 영화세계가 구분된다고 할 수 있지요.
영화의 프레임, 좀 더 정확히는 스크린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표준 스크린(standard screen)과 와이드 스크린(wide screen)이 바로 그것이지요. 표준 스크린은 가로 세로비가 1.37대 1이고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같은 와이드 스크린은 2.35대 1입니다. 표준의 경우 가로세로비가 4대3인 TV 화면과 거의 흡사하지요. 그래서 요즘 영화들은 이미 제작단계에서 TV 방영 및 비디오 출시를 고려해서 대부분 표준 스크린에 맞추어 촬영을 하게 됩니다. 이따금 와이드 스크린으로 찍은 영화들이 제작되기도 하지만 제작단가도 비싸고 게다가 비디오로 전환될 경우 좌우의 공간이 가차없이 잘려나갈 수밖에 없는 탓에 기피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공동경비구역 JSA>는 시네마스코프의 사이즈를 구현하기 위해서 슈퍼 35mm로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스크린을 통해서 2.35대 1의 비율로 구현되는 슈퍼 35mm는 화면을 깊이 있고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좌우 공간이 넓기 때문에 탁 트인 시야를 보여주게 됩니다. 막혔던 남북관계를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바라보자는 감독의 염원이 담겼다고 나 할까요.
미학적 장치로서의 프레임의 기능
미학적으로 볼 때 프레임은 중대한 예술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첫째는 프레임을 통해 소재의 취사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맥락상 중요하지 않거나 관계없는 것을 배제하고 꼭 필요한 단편들만을 프레임 속에 담아낸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혼동으로 가득 찬 현실세계가 프레임을 통해 걸러지면서 질서정연한 영화적 세계로 재구성된다고 할 수 있지요. 두 번째는 프레임이 강조의 기능을 한다는 겁니다. 하찮은 디테일을 확대하여 보여줄 수 있는 클로즈업의 경우가 단적인 예이지요. 세 번째는 프레임이 일종의 창문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창틀'로 역시 프레임이라고 불립니다. 창문을 통해서 이웃집을 훔쳐본다고 나 할까요. 아무튼 이 훔쳐보기는 영화가 갖는 아주 중요한 매력포인트인지도 모릅니다. 이웃집여인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욕망이 현실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지만 그것이 영화감상이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지요. <원초적 본능>에서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수사관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샤론 스톤의 육감적인 자태는 바로 이러한 창문(프레임)을 통한 엿보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영화감상의 한 특권입니다. 히치콕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 이를테면 <사이코>, <이창>등은 모두 이러한 창을 통한 엿보기 심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영화들입니다.
요컨대 감독은 프레임 안의 특별한 위치에 사람과 사물을 배치함으로써 어떤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게 됩니다. 루이스 자네티에 따르면, 프레임 안의 배치는 영화예술의 형식(form)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영화적 내용(content)으로 전환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같은 사물 내지는 사람이라도 프레임의 어느 위치에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주는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반적인 심적 구조로 볼 때 프레임의 상단(top)은 힘 또는 열망과 관련된 관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적인 존재는 저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그래서 신적 광휘(光輝)는 위로부터 내려오지요. 또한 통치자는 위에서 군림하며 아래를 지배하게 되지요. 그래서 영화에서 어떤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캐릭터는 대부분 프레임 상단에 배치하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프레임의 아래쪽, 즉 하단부분(lower part)은 굴종, 취약성, 무력감 내지는 위험을 나타내지요. 프레임의 중앙(center)은 당연히 중요한 시각적 요소들이 차지하게 되지요. 프레임의 좌우 양옆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미지의 것 또는 망각(忘却) 등을 나타낼 때 이 부분이 이용되지요. 이밖에도 프레임과 카메라 사이라는 보이지 않는 부분도 고려해야할 사항입니다. 배우가 카메라를 향해 있다면, 즉 관객을 바라보고 이야기할 경우는 프레임이 바깥으로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그만큼 영화에서 프레임의 활용범위는 넓다고 할 수 있지요.
일단 프레임의 의미를 파악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제약과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프레임에 사물과 사람을 어떻게 또는 어떤 원리에 근거해서 배치할 것인가를 따져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바로 구성(구도)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구성은 프레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안정된 화면을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구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극적 맥락(dramatic context)에 맞게 구성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구도가 제대로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도(구성)가 좀 삐딱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구성으로 인해서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에서 샘 닐이 언덕을 뛰어 내려가는 장면은 구도 자체로만 본다면 좋은 구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런 삐딱한 구도를 감독은 선택했을까요? 아내의 불륜 소식을 듣고 광분해서 달려가는 사람의 심정을 그 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극적 맥락에 따라서 나쁜 구도가 더 효과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구성의 문제를 좀 더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심리학자 및 미술사가들은 구성을 무게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캔버스(프레임)에 그려진 이미지들을 볼 때 여타의 구성 요소가 같은 경우 무게중심이 어느 쪽에 가 있는가를 한번 따져보세요. 학자들에 따르면, 텅 빈 캔버스를 좌우로 나눌 경우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무겁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 본질적인 무거움을 상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편에 주된 사물을 먼저 배치한다는 것이지요. 정물화일 경우 꽃병을 중심선보다는 약간 왼쪽에 치우쳐 배치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오른쪽으로 쏠렸던 무게중심을 상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문제가 생깁니다. 그 꽃병 탓에 이번에는 무게중심이 왼쪽으로 기운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떡합니까? 오른쪽 빈 공간에 사과 같은 과일들을 몇 알 채워 넣잖아요. 양파도 집어넣고요. 그래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가장 안정적이라는 역삼각형 구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보기도 좋고요. 열이면 열 다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7-8할은 이런 방식으로 캔버스를 채워나간다는 얘기지요.
캔버스를 상하로 나누었을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무게중심은 위로 쏠리게 되어있습니다. 하늘 쪽이 무겁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 풍경화를 그릴 때 화가들은 하늘 부분을 한 삼분의 일로 잡고 산을 포함한 땅 부분을 삼분의 이로 채우는 것이랍니다. 그래야 안정감이 느껴지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들은 사람들은 본래 평형상태(equilibrium)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평상심(平常心)을 잃어버리고 극도의 분노나 극도의 슬픔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 그런 불안정한 심적 상태가 장시간 지속될 경우 심각한 정신 장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래의 평형상태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지요. 같은 이치가 시각적 평형감각에도 적용된 것이 바로 안정된 구도의 추구입니다. 영화의 경우 바로 이러한 구성(구도)의 원리에 입각해서 미장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 바탕을 해서 극중 인물의 불안정한 심리를 나타내고자 할 때는 과감하게 안정된 구도를 깨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구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극적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 미장센의 구성요소
미장센의 다양한 요소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화촬영, 프로덕션 디자인, 그리고 연기 스타일 등이 그것입니다. 영화의 시각디자인에서 미장센에 기여하는 배우의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미장센의 연출과 관련이 있는 기본적인 협력관계는 감독, 촬영감독 그리고 프로덕션 디자이너 사이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감독이나 촬영감독은 그렇다 치더라도 프로덕션 디자이너(Production Designer)는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영화의 세트 및 장소를 위한 전체적인 외관(look)을 설정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개념이 가장 먼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9년도인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제작을 맡았던 데이빗 셀즈닉(David O. Selznick)이 그 영화의 디자이너였던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에게 제작에 관련된 모든 디자인을 일임하면서 본격적인 의미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개념이 확립된 것이지요. 이 영화는 마가렛 미첼의 명작소설을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그 엄청난 서사를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영상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지요. 남부의 대평원과 아름다운 풍광은 모두 프로덕션 디자인이 만들어낸 볼거리였던 것입니다. 이 프로덕션 디자인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도구들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지요.
◎ 영화촬영의 핵심적인 요소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의 미장센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촬영입니다. 촬영을 어떻게 하느냐 또한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대상이라도 엄청 달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사적으로 볼 때 거장 감독에게는 언제나 유능한 촬영감독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상 최고의 영화라 일컬어지는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도 그렉 톨런드(Gregg Toland)라는 걸출한 촬영감독이 없었다면 아마 그처럼 높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딥포커스(deep- focus) 촬영기법은 이후 수많은 영화들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명콤비를 이룬 경우는 또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감독가운데 한사람인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에게는 평생을 함께 한 촬영감독이 있었는데, 바로 스벤 니크비스트(Sven Nykvist)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20여 편에 달하는 베리만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해서 빛나는 걸작들은 많이 남겼습니다. <침묵>(1962년) <페르소나>(1965년) <수치>(1967년)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화니와 알렉산더>(1983년) 등이 공동작업의 산물들입니다. 니크비스트는 가장 단순한 촬영 속에 가장 심오한 리얼리티를 담아내려고 한 빛의 마술사였습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과 많은 작품을 함께 했던 비토리오 스토라로(Vittorio Storaro)도 유명합니다. <거미의 계략>(1970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3년) <마지막 황제>(1987년) 그리고 <리틀 부다>(1994년) 등이 두 사람의 대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각각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은 그 동안 <만다라>, <서편제> 그리고 <춘향뎐>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콤비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요컨대 촬영감독은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촬영될 어떤 장면의 조명, 색채, 카메라 위치를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조명 디자인에 대한 접근
이제 촬영감독의 역할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임하기 전에 우선 먼저 찍어야 할 장면의 조명을 디자인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보통 두 가지의 주요 전략이 사용됩니다. 리얼리즘과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의 전략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영화는 후자를 형식주의적 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명의 원천대로 촬영하는 방식이 리얼리즘적인 방식이고, 일상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으로 조명을 설계하는 것을 픽토리얼리즘이라고 합니다.
리얼리즘과 원천 시뮬레이션
일단 스크린에 보이는 모든 장면은 주된 원천이 되는 하나의 조명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사물이 보일 테니까요. 만약 그것이 실외, 즉 일광조명이라면 조명의 원천은 태양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실내장면이라면 조명의 원천은 테이블 램프, 천장에 달린 등, 창문을 통해 보이는 가로등이 될 것입니다. 만약 세트에 있는 테이블 램프가 카메라를 위한 조명의 실질적인 원천으로 작용한다면, 그 조명은 실제적(practical)인 조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름의 노출에 실제로 작용하는 세트에 있는 가시적 조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그 테이블 램프에 의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실내 장면이 그 정도의 밝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효과를 위한 조명과 노출을 위한 실제적 조명이 구분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촛불 하나만을 달랑 켜 논 방안에서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찍고자 할 때 그런 효과를 살려서 촬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다른 조명기구 없이 촛불 하나만 갖고는 노출이 턱없이 부족하여 촬영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조명을 무턱대고 쓰면 촛불효과는 제대로 낼 수가 없게 되지요. 따라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게 됩니다. 조명기구를 사용하면서도 마치 촛불만을 가지고 촬영을 한 것 같은 효과를 내야 하거든요. 이처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스크린에 명백한 원천(예컨대 촛불)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조명을 리얼리스틱 조명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정리하면 장면에 보이는 촛불이 실은 조명의 원천은 아니지만 마치 원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원천 시뮬레이션이지요.
이런 효과 조명과 원천 시뮬레이션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기로 하지요. 샤론 스톤과 윌리엄 볼드윈이 나오는 <슬리버>(1993년)를 보면 두 남녀가 마주앉아 얘기를 하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는 밝게 빛나는 촛불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빛은 이 장면에서 실질적 조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노출을 위한 실제의 조명은 카메라 바깥, 즉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는 말이지요. 촛불만으로는 너무 어두워서 레스토랑 전체를 빛 출 수가 없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촬영감독인 필모스 지그몬트(Vilmos Zsigmond)는 렌즈를 적당한 시야심도를 유지할 만큼 충분히 넓히고 촛불 뒤에 조그만 전구를 보완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실제적인 촬영에서는 촛불 자체가 조명의 원천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효과만큼은 충분히 달성했던 것입니다. 관객들은 그 촛불 때문에 실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녀간의 대화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으니까요. 아무런 의심 없이 말이죠.
픽토리얼리즘
실제적인 조명 디자인의 목적이 상정된 원천(이를테면 촛불)과 양립할 수 있는 조명에 기여하기 위해 꾸며진 것이라면, 그 대안인 픽토리얼 조명 디자인은 순전히 회화적이고 시각적인 가치만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 백작(게리 올드먼)이 토지중개인 조나단 하르커(키아누 리브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벽에 비친 드라큘라의 섬뜩한 그림자는 그 단적인 예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효과는 배면 영사(rear projection)를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현실에서라면 사람의 그림자가 따로 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영화에서라면 가능합니다. 이 장면에서 그 섬뜩한 그림자는 사실 게리 올드먼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똑같은 차림을 한 엑스트라가 흰 벽처럼 보여지는 스크린 뒤에 숨어서 올드먼의 동작에 맞추어서 시늉을 하고 그 뒤에서 영사를 하면 마치 올드먼의 그림자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지요. 코폴라 감독은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픽토리얼 조명 디자인을 통해서 뱀파이어 세계의 기괴함을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명 디자인의 첫 번째 유형 : 하드 & 소프트 조명
일단 촬영감독과 감독이 리얼리스틱 요소와 픽토리얼리스틱한 요소들 간의 전반적인 균형을 결정했다면, 다음에는 경조광(hard light) 및 연조광(soft light)의 비례에 따라서 조명 디자인을 세분화하게 됩니다. 하드 및 소프트 라이트는 빛의 감소(fall-off) 및 명암대비(contrast)에 비례해서 달라지게 됩니다. 하드 라이팅은 빛의 급격한 감소를 나타냅니다. 그리하여 조명이 비춰지는 부분과 어둠에 묻히거나 그림자가 진 부분간의 경계가 뚜렷하게 정해지지요. 감소의 비율 내지는 빛에서 어둠으로의 변화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빛과 어둠 사이에 강한 명암대비를 창출하게 됩니다. <터미네이터>에서 강인한 인상의 아놀드 슈워츠네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의 금속성처럼 각진 얼굴의 형태와 질감은 경조광을 통해서 얻어진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반대로 소프트 라이팅은 삼차원적인 공간에 대한 정보의 원천을 감소시킵니다. 소프트 라이트는 고도로 분산되거나 흩어지기 때문에 평면적인 외관을 창출하게 되지요. 그래서 여성 캐릭터의 경우에는 부드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서 연조광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전문적인 용어라 좀 어렵지요.
조명 디자인의 두 번째 유형 : 하이- & 로우- 키 라이트
하드 및 소프트 조명 디자인은 하이 키 및 로우 키 조명 설치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방식인 삼점 조명(three-point lighting)에서 주광(key light)은 보통 연기자의 얼굴을 비춰주는 조명의 주된 원천입니다. 여기에 다른 두 개의 조명의 원천인 보조광(fill light)과 역광(back light)이 덧붙여지는 것이지요.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는다고 할 때 카메라는 보통 두 사람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하게 되고 카메라의 약간 오른편에서 키 라이트(주광)를 비춰주게 됩니다. 정면에서 조명을 때려주면 배우들의 얼굴이 평면적으로 보이게 되기 때문에 약간 오른쪽에서 키 라이트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배우의 오른쪽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게 됩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 필 라이트(보조광)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밝기를 채워준다고 나 할까요. 이때 조명의 강도(밝기)는 주광이나 보조광이나 같습니다. 그렇다면 백 라이트(역광)는 어떤 때 필요한가? 배우와 배경간에 삼차원적인 공간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백 라이트를 쓰게 됩니다. 우리가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을 때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특히 조명의 위치를 한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조명 디자인의 두 번째 유형인 로우- 키 라이팅과 하이- 키 라이팅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로우- 키 라이팅은 약한 필 라이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밝은 키 라이트로 특징 지워집니다. 일반적으로는 주광이나 보조광이나 모두 밝기가 같지만 로우 키 라이팅에서는 일부러 보조광을 약하게 하여 그림자가 지는 부분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로우 키 라이팅은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명암대비)를 창출하고 나아가 보다 선명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조명은 보통 경조광(hard light)이고, 보조광이 미약하거나 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명암대비는 더욱 커지게 되지요. 게다가 화면 자체가 전반적으로 어둡다는 인상을 줍니다. 느아르 영화(<세븐>처럼 암흑가를 그린 영화)나 공포영화의 섬뜩한 분위기에 아주 잘 어울리겠지요.
하이- 키 라이팅은 로우- 키 라이팅과는 정반대라고 보면 됩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이 키 라이팅은 주광과 보조광을 거의 같은 밝기의 강도로 사용합니다. 장면전체를 통해서 조명이 고르게 비추기 때문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간의 명암대비가 약하고 그림자가 지는 부분이 적습니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게 되겠지요. 이 때문에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 내지는 코미디물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조명 디자인만 보고도 어느 정도는 장르영화의 특성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정리해보지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공포영화라 당연하게도 로우- 키 라이팅을 사용했지만 전체적인 조명 디자인의 구상은 픽토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느아르 영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세븐>은 장르의 특성상 로우- 키 라이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전반적인 조명 디자인의 구상은 리얼리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드라큘라 소재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범죄세계를 다룬 느아르 영화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 프로덕션 디자인
영화촬영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았지만 사실 프로덕션 디자인(production design)이 선행되지 않으면 영화촬영을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트를 먼저 짓고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런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판문점 세트를 짓느라고 촬영이 다소 늦어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요.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영화의 시각적 환경에 대한 디자인을 총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컨대 프로덕션 디자인은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감독이 협력하여 세트(세트 디자이너), 의상(의상 디자이너), 매트, 미니어처 등을 계획하고 만들어내는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지요. 이미 지적했듯이 프로덕션 디자이너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제작자 데이빗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만들면서 윌리엄 카메론 멘지가 디자인한 스케치의 중요성에 가치를 부여하면서부터였지요. 프로덕션 디자인의 기본적인 도구는 의상, 세트, 매트 그리고 미니어처들입니다.
의상 디자인
의상 디자인은 모든 영화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특징이지만 시대극 및 판타스틱 영화에서 관객에게 가장 어필하는 미장센의 요소들은 다름 아닌 의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에서는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노론과 왕권정치를 옹호하는 정약용의 세력간을 구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옷의 색깔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여균동 감독의 <미인>에서도 의상 디자인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실상 두 남녀 주인공들은 거의 옷을 벗다시피 하고 나오지만 여주인공의 팬티 색깔만은 유독 화이트(white)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만의 사적 공간인 아파트 내부도 온통 흰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지요. 감독은 이를 우윳빛이라고 부르더군요. 아무튼 살 냄새 물씬 나는 영화에서 흰색 의상은 역설적으로 순수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요.
세트, 매트, 미니어처
영화적 세계가 주는 비현실성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인공물을 통해 창출된 비현실적인 세트 및 장소들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팀 버튼의 <에드워드 가위손>의 세트는 그 단적인 예이지요. 에드워드가 홀로 사는 마치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음침한 분위기의 거대한 대저택은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활기찬 마을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매트(matte)는 무대배경의 일부분으로 특수 제작된 그림을 말하는데, 현상을 할 때 등장인물을 찍은 쇼트와 함께 합성 인화하여 그 인물이 마치 진짜 배경에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배경은 모두 매트로 된 것이지요. 미니어처는 실물보다 작게 만든 일종의 모형으로 대부분 장난감 수준의 크기지만 <타이타닉>에서 사용된 배는 90%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크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염두에 둘 것은 영화 속의 무대(장소)와 실제의 현장과는 무관한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입니다. 영화촬영에서는 변형과 급조가 다반사로 이루어지지요. 스파이크 리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의 무대는 본래 뉴욕의 브룩클린입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와인 토마스(Wynn Thomas)는 그러나 영화의 주제상 황량함을 강조하기 위해 가로수가 별로 없는 블록을 원했지요. 그리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그런 곳을 물색했지만 여기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탈리아의 피자가게도 말이죠. 할 수 없이 세트를 모두 새로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사진관은 실제 사진관을 전세 낸 것이 아니라 구멍가게를 개조하여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판문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아예 촬영허가조차 받을 수 없는 금단의 장소니까요. 올리버 스톤 감독의 <7월4일생>은 베트남과 멕시코가 주요 무대지만 실제로는 필리핀 등지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디자인 개념
세트 데코레이션, 의상 디자인의 작업을 관장함에 있어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디자인 개념(design concept)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세트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리고 의상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보이도록 할 것인가 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개념입니다.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년)는 프로덕션 디자인에 관한 한, 신기원을 이룩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무대는 미래사회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들은 인구가 포화상태인데다가 건축물들은 낡아서 붕괴조짐을 보이고 게다가 전반적으로 부패해 가는 도시들을 떠나서 이 지구바깥에다 쾌적한 식민지를 재배치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영화내용에 맞게 시각디자인도 독특하지요. 민족과 언어가 혼합되어있는 게토 같은 도시 빈민가에는 잠시 체류중이거나 직업 없이 떠도는 인간들로 북적거리는 한편 그들의 머리위로 솟은 고층 건물 위에는 대형 전자 광고판이 번쩍거리고 각종 매체를 통한 메시지들이 전달됩니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대립되는 듯한 딴 세상(하이테크 고층 건물과 지저분한 빈민가)이 공존하는 셈입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렌스 폴(Lawrence G. Paul)은 미래의 사회현실을 아주 강렬한 시각적 환경 속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디자인 개념
세트 데코레이션, 의상 디자인의 작업을 관장함에 있어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디자인 개념(design concept)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세트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리고 의상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보이도록 할 것인가 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개념입니다.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년)는 프로덕션 디자인에 관한 한, 신기원을 이룩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무대는 미래사회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들은 인구가 포화상태인데다가 건축물들은 낡아서 붕괴조짐을 보이고 게다가 전반적으로 부패해 가는 도시들을 떠나서 이 지구바깥에다 쾌적한 식민지를 재배치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영화내용에 맞게 시각디자인도 독특하지요. 민족과 언어가 혼합되어있는 게토 같은 도시 빈민가에는 잠시 체류중이거나 직업 없이 떠도는 인간들로 북적거리는 한편 그들의 머리위로 솟은 고층 건물 위에는 대형 전자 광고판이 번쩍거리고 각종 매체를 통한 메시지들이 전달됩니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대립되는 듯한 딴 세상(하이테크 고층 건물과 지저분한 빈민가)이 공존하는 셈입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렌스 폴(Lawrence G. Paul)은 미래의 사회현실을 아주 강렬한 시각적 환경 속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 연기 스타일
우리는 흔히 미장센에 대해서 논할 때 연기 스타일은 등한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기 스타일이야말로 정적인 미장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를 논할 때 우리는 먼저 영화와 연극의 연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영화의 연기는 연속성이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워터프론트>에서 마론 브란도가 그의 형제와 차안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의 투쇼트(두 사람)는 함께 찍은 것이지만 이어지는 각각의 클로즈업의 경우는 따로따로 찍은 것을 편집을 할 때 연결하여 마치 실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둘째로 영화는 카메라(클로즈업)와 사운드 장치를 통해서 가장 사소한 제스처 및 가장 적은 목소리라도 확대할 수 있다는 거지요. 셋째로 촬영 중에 관객이 부재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즉각적인 피드백이 영화의 연기에는 없습니다. 배우의 입장에서 볼 때는 벽에다 대고 연기를 하는 셈이지요. 어쨌든 영화 연기의 범주는 크게 주연, 조연, 엑스트라로 나뉩니다.
스타 페르소나
주연, 조연, 엑스트라가 앙상블을 전체적인 영화의 연기가 살아나게 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기 주연의 연기입니다. 일찍부터 작품을 구상하고도 주연연기자들의 캐스팅이 제대로 안 되는 바람에 제작이 미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요컨대 주연배우가 결정된다면 시작이 반이라고 영화의 절반은 완성된 셈입니다. 그런데 주연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스타 페르소나(star persona)를 지닌 배우라야만 주연으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연기자 부재를 탓하면서도 늘 특정인 몇 사람만을 주연으로 기용하는 것도 주연감(스타 페르소나)인 연기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국 스타 페르소나란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한눈에 보아도 주연임을 알 수 있는 그러한 스타를 말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의 경우 한석규, 최민수, 박중훈, 이정재, 박신양, 심은하, 고소영, 김희선, 전도연, 신은경 정도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기를 잘하기로는 송강호나 방은진이 뛰어나지요. 하지만 이들을 주연 감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지요. 스타 페르소나(주연감)는 다시 개성 있는 스타(personality star)와 캐릭터 스타(character star)로 나뉘어 집니다.
먼저 개성 있는 스타란 존 웨인(서부극)이나 줄리아 로버츠(신데렐라)처럼 영화에 출연할 때마다 늘 동일한 인물 유형을 보여주는 스타를 말하는데, 이들은 어떤 역할을 맡든 지간에 늘 자신의 개성(personality)이 더욱 부각되는 그런 스타의 전형이지요. 김희선과 고소영의 경우 출연하는 드라마 또는 영화마다 다른 역할임에도 극중 캐릭터보다는 자연인으로서의 본인들의 개성이 더욱 부각되지요. 영화 밖과 영화 속의 인물이 별로 구분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는 달리 캐릭터 스타는 메릴 스트립(<아웃 오브 아프리카> <소피의 선택> <리버 와일드>)이나 로버트 드니로(<택시 드라이버> <굿펠라스>), 더스틴 호프만(<졸업> <미드나이트 카우보이> <레인맨>)처럼 출연하는 영화마다 각기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를 말합니다. 요컨대 배우자신(로버트 드니로)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맡은 캐릭터(<택시 드라이버>의 트레비스 비클)가 더욱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지요. 드니로는 <분노의 주먹>에서는 진짜 권투선수를 방불케 하는 캐릭터를 맡아서 열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배우 가운데는 송강호가 캐릭터 스타에 해당하는 드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송강호에게는 개성(퍼스널리티)이라는 측면에서의 스타성은 부족하지만 캐릭터를 소화하는 능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는 처음부터 주연 감은 아니었습니다. 한석규가 처음부터 주연 감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지요. 한석규가 <초록물고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송강호는 고작해야 막둥이(한석규)를 괴롭히는 양아치 역할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서 잠깐 비친 송강호의 모습이 너무나도 리얼해서 진짜 양아치를 캐스팅 했다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그 후 송강호는 <넘버 3>에서 깡패 캐릭터의 진수를 보여주게 됩니다. "배배 배신이야"라고 버벅거리는 실감나는 연기는 두고두고 화제 거리가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쉬리>에서는 주연급인 한석규의 퍼스널리티와 최민식의 캐릭터에 밀려서 이렇다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다가 <반칙왕>(리뷰 참조)에 와서 기존의 양아치 내지는 깡패 캐릭터를 훌훌 벗어버리고 소시민의 전형적인 캐릭터로 거듭나게 됩니다. 연기자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군 중사 오경필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여 작품의 격조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겁니다. 퍼스널리티 스타만이 판을 치는 우리 영화판에서 캐릭터 스타의 화려한 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배우의 경우 심은하와 전도연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모만 그럴싸한 퍼스널리티 스타에 머물지 않고 캐릭터 스타로의 변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리뷰에 올라 있는 <미술관 옆 동물원>과 <해피엔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 내러티브 영화의 등장
초기의 영화의 역사에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중요성과 대중을 위한 제작간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하라.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기를 전달하고자하는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물 뿌리는 정원사>(1895년)의 경우 비록 한 장면만으로 되어있지만 장난치는 아이와 그를 벌주는 정원사간의 실랑이가 주된 스토리텔링을 이루고 있다.
내러티브 영화는 초창기의 미국의 영화 산업에서 지배적인 제작의 범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관객 대중이 열렬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06년경부터 미국에서는 이른바 니클로데온(nickelodeon)이라는 싸구려 극장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중들은 5센트 내지는 10센트만 내면 언제든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내러티브 영화가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당시에는 각별한 사건들(풍물기행, 왕의 대관식, 국가적 행사 등등)을 찍은 다큐 영화들이 관객의 흥밋거리였다. 하지만 볼만한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몇 날이고 몇 년이고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제작사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회전에도 문제가 많았다. 한편 대중은 점차 니클로데온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들고 이러다 보니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바로 이러한 수급(需給) 불균형을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한 것이 내러티브 영화의 제작이었다. 영화사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해 애태울 필요 없이 적당한 이야깃거리들을 찾아서 영화로 찍으면 그만이었다.
- 내러티브의 중요성
스토리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내러티브는 보편적인 인간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가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일종의 내러티브다. 내러티브는 보편적인 문화적 표현이다. 내러티브 자체가 근본적인 인간의 사유방식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물론 모든 내러티브가 픽션이란 얘기는 아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일종의 내러티브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환자는 자기의 라이프 스토리를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분석가가 하는 일은 환자로 하여금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 내러티브의 구성요소들
내러티브는 모종의 시점에서 말을 건네는 내레이터(narrator)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화자가 실제(real) 인물이건 상정(implied)의 인물이건 상관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말을 듣는 관객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를 정리하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내레이터와 관객간에 느슨한 계약관계(fictive stance)가 성립한다는 것이며, 둘째, 스토리와 플롯이 결합하여 일정한 순서로 내러티브를 형성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내레이터의 시점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1) The Fictive Stance
내레이터와 관객은 지금 말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허구의 상태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요컨대 허구적인 내러티브를 대하고 있는 관객은 그것이 논픽션의 경우처럼 어떤 사실감의 무게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에서 강렬한 정서적 감흥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 내러티브의 오묘함이 있다.
2) Narrative Text ---Story와 Plot 으로 이루어짐
이 스토리와 플롯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파뷸라(fabula)와 슈제트(syuzhet)에 각각 상응한다.
* 파뷸라 : 내러티브의 인지자가 가정과 추론을 통해 창조하는 하나의 패턴이다. 그것은 내러티브의 단서, 적용된 개요, 구성과 시험된 가설 등에서 추출한 발전된 결과이다. 우리는 두 가지 내러티브 사건이 있을 때 원인, 공간, 시간의 연결을 추적한다. 우리가 창출한 시각적 재구성이 형식주의자들이 명명한 파뷸라이다. 파뷸라는 공간의 영역과 주어진 지속시간 내에 발생하는 사건의 인과관계, 연대기적 행위를 포함한다. 영화 <이창>의 경우 대부분의 탐정물처럼 파뷸라 구성의 명백한 과정이 존재한다. 예컨대 범죄의 조사는 여러 가지 명백한 연결로 설정되어 있다.
영화의 파뷸라는 장면과 배경음악처럼 물질적으로 제공된 것이 아니다. <이창>에서 관객은 제프리가 창밖을 내다보는 쇼트를 본다. 이때 그의 행동은 우리(관객)에게 이야기의 사건을 추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프리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 슈제트 : 일종의 체계다. 특정한 원리에 따라 구성요소를 배열하기 때문이다. 슈제트는 특별한 사건의 유형(행위들, 장면들, 전환점들, 플롯의 역전)으로 구성된다.
* 스타일(style) : 영화적 기법의 체계적인 사용을 지칭한다. 스타일은 미장센, 편집, 사운드와 같은 영화적 기법의 적용을 통해 구현된다. 내러티브 영화에서 슈제트와 스타일은 공존한다.
- 슈제트와 스타일의 차이점
<이창>의 경우 슈제트는 살인자와 조사, 리사와 제프리의 로맨스로 이루어짐. 반면 제프리와 스텔라가 트월드에게 발각되는 장면을 통해 스타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재빨리 제프의 방으로 돌아간다(인물의 움직임, 배경). 2) 그들은 비명을 지른다(사운드). 3) 램프의 조명을 끈다(조명). 4) 카메라는 재빨리 트래킹하여 롱쇼트로 바뀐다(촬영기법). 5) 이 같은 상황이 일어난 후 트월드가 창문을 바라보는 쇼트로 바뀐다(편집). 이처럼 슈제트는 영화의 드라마투르기 과정을 나타내며 스타일은 영화의 기법적 과정을 다룬다는 차이가 있다.
- 내러티브 구조의 정의 : 이야기는 서사적 표현의 내용이고, 플롯은 그 표현의 형식이다.
* Story와 Plot의 차이
이야기---영화화면에 분명히 나타난 사건들과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추측할 수 있는 사건들의 총합
Story is the narrative in chronological order, the abstract order of events as they follow each other. That is, like a signified, story is what the reader conceives or understands.
플롯 --- 영화화면에 분명히 나타난 사건들과 극중인물들은 전혀 알 수 없지만 화면에 나타나는 여타의 시각적-청각적 효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건들의 총합
Plot is the narrative as it is read, seen, or heard from the first to last word or image. That is, like a signifier, it is what the reader perceives.
===>관객들이 실제로 영화를 통해 보고 듣는 것은 Plot이며 이로부터 역으로 자기 나름대로 Story를 재구성(이해 내지는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이 내러티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 플롯 구성의 원리
1) 디테일의 선택과 생략 : 모든 사건들을 다 플롯에 담을 필요는 없다. 스토리 속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포함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플롯 구성이란 세부사항들의 의도적인 생략 내지는 선택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플롯이 구성됨에 따라서 어떤 사건들은 배제되고 어떤 사건들은 포함된다. 미스터리 내지는 서스펜스 영화에서 어떤 사건들은 고의적으로 누락된다. 관객이 미쳐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식스센스>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텔미썸딩>은?
2) 인과관계의 원리 : 두 번째로 중요한 원리다. 확고부동한 인과관계와 느슨한 인과관계가 있다. 전자(explicit causality)는 1930년대에서 50년대에 걸쳐서 할리우드에서 확립된 고전 내러티브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들에서 플롯 구성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목표 지향적이다.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의 경우를 보자. 후자(implicit causality)는 예술영화를 표방하는 영화들에서 주로 나타난다. 내러티브 인과관계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영화들도 있다.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엔바드에서>(1961년) 같은 영화들은 그 단적인 예다.
3) 하위 플롯 : 사실상 모든 내러티브 영화들은 아무리 단순하다하더라도 하위플롯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풀몬티>에서 주된 플롯은 실직자들의 생존투쟁이지만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하위플롯을 이룬다.
*내러티브의 기초---이항대립
ex) 남성/여성, 흑/백, 이성애/동성애, 선/악, 주체/객체 등등
이러한 이분법에 따라서 대부분의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내러티브 텍스트로 나뉘게 된다.
1) 균질적 텍스트---Coherence추구: 경험에 질서 부여하기, 대상화를 통한 지배, 타자성의 거부
2) 불균질적 텍스트---Incoherence 드러냄
이항대립에서 벗어남, 그러나 그것은 의식적일 수 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 도 있다.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려는 경향 보임
- 디제시스의 개념
디제시스란 한마디로 내러티브의 세계(narrative world)를 말한다. 디제시스(diegesis)의 개념은 텍스트가 창출해 낸 세계와 어떤 부가적인 특질들(비디제시스적 세계) 간의 구분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디제시스적 세계와 비디제시스적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러티브 속에 있는 캐릭터들이 지각할 수 있는 것(시청각 텍스트에서 보고 듣는 것)과 관객들이 지각하는 것간의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다. 극중 캐릭터들은 디제틱 자료들(diegetic material)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지만, 관객은 비디제틱 자료들(non- diegetic)을 포함하여 텍스트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다.
디제시스의 세계는 형식, 매체, 혹은 장르라고 하는 특정한 컨벤션에 의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디제시스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데, 만약 텍스트 내에 불연속적인 부분들이 있게 되면 관객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세계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관성 있는 디제시스를 창출하는 데 사용되는 한 가지 장치는 내러티브 보이스(narrative voice)이다. (Nick Lacey)
- 수잔 헤이위드의 정의 : 디제시스는 내레이션과 내러티브의 내용, 스토리 내부에서 묘사된 허구의 세계를 가리킨다. 영화에서 그것은 스크린 위에서 실제로 전개되는 모든 것, 즉 허구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등장인물들의 말이나 몸짓, 스크린 위에서 행해지는 모든 연기들이 디제시스를 형성한다. 따라서 디제시스적 사운드란 스크린 내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모든 소리를 일컫는 말이다. 반면 비디제시스적 사운드란 스크린 내 공간에서 발생하지 않는 소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디제시스 개념은 연구자들간에 편차가 크다.
* 실제비평
1) Robert Zemeckis의 <Forrest Gump>---균질적 텍스트의 전형
검프의 회상형식으로 시작(안정적 내러티브 구조)
발단---꼬마 검프와 제니의 만남, 대장정(Long March) 시작--Leitmotif
엘비스가 스타가 된 이유
상승---체육특기자로 대학입학: 알라바마 주지사 및 케네디 접견
절정---군에 입대하는 검프: 극중인물 바버와 댄 중위 만남
실존인물 존슨 대통령, 존 레논, 닉슨 대통령 만남
하강---사업가 검프, 제니와 재회: 댄 중위의 회개, 떼돈 범
대단원--- 고독한 질주: 제니와 사별, 아들 얻음
2) Doris Dori 의 <Keiner Liebt Mich>---불균질적 텍스트의 한 예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노처녀 파니 핑크의 사랑 찾기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깔고 있는 일종의 페미니즘 영화다. 이 영화에는 세 종류의 사랑방식이 존재한다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이 영화의 Leitmotif는 관(죽음=무덤tomb=모태womb=여성성=여성의 굴레)인데,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을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것은 억압된 여성성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미장센(연출)과 내러티브|작성자 런
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Mon fils a moi(2006)
감독 마르시알 푸주롱│출연 나탈리 베이, 빅토르 세보, 올리비에 구르메
영화에서는 유독 극단적인 모자관계가 많이 다뤄진다.
잘못된 부녀관계는 성폭력으로, 잘못된 모녀관계는 생면부지의 관계처럼 살아가는 모습으로(거의 예외없이)영화나 르포프로그램에서 다뤄지는데 반해 비정상적인 모자관계는 항상 정신적인 부분에서 조금 더 복잡해보인다. 다른 관계들과 달리 '집착'이라는 상태가 항상 개입된다.
그 집착의 뿌리에는 남편에 대한 실망감, 삶에 대한 불만족감 등과 더불어 이성(異性)이라는 묘한 심리가 포함되곤 한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10세(15세인가?)이후에는 엄마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고 하는데 엄마는 생의 마지막날 까지 그런 준비를 하지 않는 듯 하다.
힘의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 진다면 아들은 자연스럽게 엄마의 품을 벗어나 다른 이성을 만나게 되고 어머니는 아들을 다른 여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이 어머니쪽으로 치우쳤을 때, 아들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때, <내 아들>에서와 같은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올가미>와 같은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 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많은 일반 가정들에서도 좀 유별난 모자관계를 볼 수 있다.
내가 정말 심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사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듯)이다.
심하게 담백한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너무 과도한 애정 표현을 하는 모자관계를 보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알고보니 내 남자친구가 그러더라, 그러면 정말 순식간에 관계를 정리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너무 이런 자극적인 영상들에 노출되어 세뇌당한 건 아닐까 싶은데 세뇌의 끝에서도 자극은 여전히 힘들다.
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Rear window(1954)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출연 제임스 스튜어드, 그레이스 캘리, 델마 리터, 웬델 코리
<현기증(1958)><싸이코(1960)>와 함께 히치콕의 관음증 3부작을 이끄는 초기작
역시 히치콕식의 스토리텔링과 제임스 스튜어드의 능청스러움은 즐겁다
내일부터 닥본사
지식채널e (월-금) 8:45
시사기획 쌈 (화)10:00
PD수첩 (화) 11:15
불만제로 (수) 6:50
현장르포 동행 (목)11:30
소비자 고발 (금) 10:00
시네마천국 (금) 11:10
다큐 3일 (토) 9:40
세계의 명화 (토) 11:00
그것이 알고싶다 (토) 11:20
일요시네마 (일) 2:40
한국영화특선 (일) 10:50
2009년 11월 26일 목요일
미장센 분석연습_Rear Window
1
1. 지배 요소 - 테이블조명. 프레임에서 가장 밝은 물체이며 왼쪽에 배치되어 있어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다.
2. 조명 키 - 이 정도면 하이 키가 아닐까? 제프리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는 장면이기 때문에 외곽을 어둡게 처리했지만 메인 프레임은 밝은 방 안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이 키가 쓰인 듯하다. 콘트라스트나 스포트라이트는 쓰이지 않은 것 같음.
3. 쇼트와 카메라 근접도 - 미디엄 풀 쇼트? 4인이 잡혀있는데 배경에 다른 인물들이 없다. 카메라의 접근 범위는 사회적인 것 같다. 제프리를 카메라로 본다면 공적이겠지만(아파트 건너편에 있으므로) 내 눈을 카메라로 본다면 그 보다는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되지 않았을까
4. 앵글 - 아이 레벨 쇼트. 제프리의 눈높이에서 하지만 거리가 있기 때문에 소리 등의 요소는 배제 된 채 객관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5. 색상값 - 아파트의 전반적인 벽지 색상이 핑크나 엷은 화이트 톤이다. 이런 밝은 색이 주를 이루는 듯.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이 필터 때문인지 연식때문인지 컬러값 때문인지 모르겠다..
6. 렌즈ㆍ필터ㆍ필름 - 내용상으로는 맞은 편 건물에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줌 인한 것이지만 실제는 표준렌즈로 촬영 된 듯하다. 비네팅필터를 사용해 비네팅 효과를 낸 것 같으며 35mm필름을 사용한 것 같다.
7. 보조 콘트라스트 - 리사(그레이스 캘리_원피스녀)와 쏜월드(안경남)
8. 밀도 - 하이 키 조명의 사용으로 디테일한 관찰이 가능하지만 고밀도가 필요한 쇼트는 아닌 것 같다. 온건한 밀도의 느낌이다.
9. 구도 - 리사와 쏜월드를 기준으로 두 영역으로 나뉜다. 경찰들까지 모두 구성요소로 포함시켜 네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무리가 있는 듯하다. 리사의 안전을 암시하는 것 같다.
10. 형식 - 닫힌 형식. 프레임은 쏜월드의 집 거실만을 프로시니엄 무대처럼 나타내고 있다.
11. 프레임 짜기 - 꽉 짜여있다. 거실 안이 리사와 쏜월드 그리고 경찰관들로 혼잡하다.
12. 깊이 - 전경의 창문과 중경의 인물들, 배경의 거실 벽으로 되어있으나 뚜렷하게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기 보다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평면적인 느낌이 든다.
13. 인물 위치 - 프레임의 가운데 부분에 두 중심인물이 있고 가장자리에 경찰관들이 있다. 리사와 쏜월드가 경찰관에게 똑같이 조사를 받으며 평등한 위치에 있어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다.
14. 무대화된 자세 - 제프리의 시선에서 리사는 등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제프리의 불안감이 가중되는 듯 하다.
15. 인물 근접도 - 좁은 거실 속에서 네 인물이 친밀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로 친밀하지 않은 사이이기에 불편한 거리이다.
2
1. 지배 요소 - 어둠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쏜월드. 어두운 푸른색 옷을 입고 있지만 어둠 속에서 가장 눈에 띈다. 또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며 제프리가 시선을 떼어낼 수 없는 긴장감을 주는 인물이다.
2. 조명 키 - 어두운 로우 키. 맞은 편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로우 콘트라스트?) 쏜월드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3. 쇼트와 카메라 근접도 - 풀 쇼트에 근접한 미디움 쇼트. 카메라는 친밀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제프리를 카메라로 보았을 경우, 그리고 방의 크기를 고려해 그 이상은 불가능 할 듯) 한 1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듯
4. 앵글 - 로우 앵글. 제프리가 휠체어에 앉아 있으므로 올려다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쏜월드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5. 색상 값 - 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어두운 톤의 옷은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6. 렌즈ㆍ필터ㆍ필름 - 표준렌즈 사용. 필터는 잘 느껴지지 않음. 필름은 역시 35mm인 듯
7. 보조 콘트라스트 - 혹시나 누군가 들어와 도와주지 않을까 해서 뒷 편의 문에 시선이 간다. 그리고 앞의 의자 정도
8. 밀도 - 위협적인 쏜 월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황량하여 더욱 공포스럽다.
9. 구도 - 쏜월드 단독 인물의 수직구도. 그가 옆으로 걷을리는 만무하므로
10. 형식 - 열린 형식. 쏜월드가 프레임 밖의 제프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11. 프레임 짜기 - 느슨하다. 제프리와 함께 묶여있다면 꽉 찬 느낌이겠지만 쏜월드만 들어있는 프레임은 쏜월드의 공격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12. 깊이 - 약간 전경에서 뒤로 물러난 위치에 쏜월드와 어둠속에 가려진 배경의 문. 두 개의 층으로 되어있다.
13. 인물 위치 - 하단 3/4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제프리의 시각에서는 위쪽에 자리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므로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14. 무대화된 자세 - 정면. 그가 카메라를 향해 걸어오는 공포를 정면으로 목격해야 한다.
15. 인물 근접도 - 방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프레임 밖의 제프리와 쏜월드는 1미터 안팎의 사적인 거리에 위치해 있다.
미장센 분석에 필요한 15가지 요소
1. 지배 요소 우리의 눈은 처음에 어디로 끌리는가? 왜 그런가?
2. 조명 키 하이 키인가? 로우 키인가? *하이 콘트라스트인가? 이것의 혼합인가?
3. 쇼트와 카메라 근접도 어떤 유형의 쇼트인가? 카메라가 행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4. 앵글 우리(와 카메라)는 대상을 올려다보는가 내려다보는가? 아니면 카메라가 중립적(아이 레벨)인가?
5. 색상값 지배적인 색상은 무엇인가? 대조가 되어 돋보이는 것이 있는가? 색채의 상징성이 있는가?
6. 렌즈ㆍ필터ㆍ필름 촬영된 대상에 대한 왜곡이나 논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7. 보조 콘트라스트 지배 요소를 본 뒤에 주로 눈이 멈추는 곳은 어디인가?
8. 밀도 얼마나 많은 시각 정보가 영상 속에 제시되어 있는가? 그 질감은 황량한가, 온건한가, 아니면 매우 상세한가?
9. 구도 이차원적인 공간이 어떻게 분할되고 조직되는가? 기초를 이루는 디자인은 무엇인가?
10. 형식 열려 있는가 또는 닫혀 있는가? 영상은 씬이라는 단편을 임의로 분리시키는 창문의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프로시니엄 무대처럼, 시각 요소들을 주의 깊게 배열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는가?
11. 프레임 짜기 꽉 짜여 있는가 아니면 느슨한가? 인물들이 돌아다닐 공간이 없는가, 아니면 방해물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가?
12. 깊이 얼마나 많은 심도에서 영상이 구성되었는가? 배경이나 전경이 중경에서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가?
13. 인물 위치 인물들이 프레임화된 공간의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 가운데? 위쪽? 밑부분? 가장자리? 왜 그런가?
14. 무대화된 자세 인물들은 어떤 바식으로 카메라와 마주하고 있는가?
15. 인물 근접도 인물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공간이 있는가?
* 하이 콘트라스트 high contrast 거친 광선과 명암의 극적 대비를 강조하는 조명 스타일, 스릴러물과 멜로물에서 종종 사용된다.
* 프로시니엄 무대 사진틀처럼 프로시니엄 아치로 전면의 개구부를 구획하고 그 안쪽으로 전개된 무대형식, 현재 대부분의 무대 형식으로 관객석과 무대가 확연하게 구획된 구조이다.
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촬영 PHOTOGRAPHY _1
1. 사실주의와 형식주의 Realism and Fomalism
(1) 사실주의(Realism)
-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 사실주의적 전통의 시초
- 단순성, 자발성, 직접성의 특징, 단지 카메라는 객관적으로 사용 즉 녹화하는 기계
- content(내용) 중심
- 기록 영화, 다큐멘터리
- 암시적으로나마 다분히 이념적임
(*) Classical cinema(고전적 영화) - Fiction movies(극영화)는 기록영화와 전위영화의 사이의 범주
(2) 형식주의(Fomalism)
- 조르주 멜리에스 <달세계 여행> - 형식주의적 전통의 시초
- 추상적, (가장 극단적인 예인) 전위 영화의 경우 pure forms(순수 형식 ; 색조, 선, 형상)이 내용의 전부를 이룸
- form(형식)과 technique(기교) 중심
- 전위 영화, 뮤지컬, SF영화, 환상적 영화
-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이념을 다루는데 뛰어남
Shot의 형식이 소재의 진정한 내용이지 현실에서 실제로 지각되는 그 자체가 꼭 소재의 내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content(내용)과 form(형식)은 상호 연관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 가장 적합하다.
2. 쇼트 The Shots
(1) extreme long shot
<수색자 The searchers│John Ford│1956>
- 근접쇼트가 어떤 맥락에서 찍혔나를 밝혀주는 공간적인 준거틀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establishing shots(구축 쇼트)라고도 불림
- 서사적 영화(epic films)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
- 촬영 장소가 중요한 역할을 함
- 서부 영화, 전쟁 영화, 사무라이 영화, 역사 영화 등
- 익스트림 롱 쇼트의 대가들: 그리피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존 포드, 구로사와 아키라, 스티븐 스필버그 등
(2) long shot
<클로저 Closer│Mike Nichols│2004>
- 연극에서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에 해당
- 이 범주 안에서 피사체와 가장 근접한 것은 Full shot(몸 전체를 겨우 담는 것)임
- pantomime(무언극)에 가장 적합하며 다양한 얼굴 표정을 잡을 수 있음
(3) medium shot
<패왕별희 Farewell my concubine│Chen Kaige│1993>
- 무릎이나 허리 위에서부터 인물을 잡음
- 해설 장면, 움직이는 장면, 대화 장면을 포착하는데 유용함
- two shot(2인 쇼트)과 three shot(3인 쇼트) 등 몇 가지의 변형이 있음. 단 3인 이상을 잡을 때에 배경에 다른 인물이 없다면 Full shot이 되어 버림
- over the shoulder shot : 보통 두 명을 잡는데 한 사람은 카메라에 등의 일부를 보이며 다른 한 사람은 카메라를 마주 대하는 것
* over the shoulder shot 의 예
(4) close-up
<샤이닝 The shining│Stanley Kubrick│1980>
- 피사체의 크기를 확대하여 사물 또는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상징적인 의미 작용을 함
- extreme close-up은 이 쇼트의 변형으로 얼굴 대신 한 사람의 눈이나 입만을 보여 줄 수도 있음
(5) deep focus shot
* 영화 속에서 케인의 아내는 자살을 시도하여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있고, 화면 밑부분엔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빈 컵과 약병이 포착되고 있다. 화면 중간에는 케인 부인이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중간거리로 보여진다. 화면 윗부분에는 원거리에서 문을 통해 들어오는 케인이 보인다. 이제 이 한 커트는 명확한 선언을 하고 있다. 관객의 눈이 움직이는 화면의 가장 밑부분에서 중간, 원거리로의 이동을 통해 극약을 케인의 부인이 마셨으며, 그것은 케인의 비인간성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펌>
* 영화사상 유명한 한 커트의 스틸이 있다. 테이블에서 천장까지 한눈에 보이는 커다란 홀 테이블 이쪽 끝의 사내와 저쪽 끝의 사내가 소리라도 질러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리, 20여명의 사람들의 얼굴 하나 하나에 또렷한 초점이 맞아있는 이 장면은 오손 웰스가 시민케인에서 사용한 딥 포커스의 대표적인 쇼트이다.<펌>
<시민 케인 Citizen Kane│Orson welles│1941>
- 광각 렌즈가 필요하기 때문에 wide angle shot(광각 쇼트)라고도 불림
- 전경, 중경, 배경의 모든 피사체를 동시에 포착하며 모두에게 선명하게 초점을 맞춤
- 롱 테이크나 미장센의 구현을 통한 관객의 선택적 감상을 이루어 냄. 즉 화면의 pin out 현상 없이도 자유로운 카메라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여 롱 테이크에 헌신, 관객은 전체 상을 보면서 스스로 상을 조합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