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는 통일 논의의 아이러니
우리나라는 금년에 국토분단(國土分斷) 63주년, 국가분단(國家分斷) 60주년을 넘겼습니다. 우리는 보통 30년의 세월을 한 ‘세대’로 보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분단사(分斷史)는 벌써 두 세대를 지났습니다.
이 같은 ‘분단’의 장기화는 민족적 불행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루 빨리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당연한 민족지상의 과제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슬로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입니다.
여기서 통일지상주의(統一至上主義)가 싹텄습니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분단은 절대악” “통일은 절대선”이라는 관념론적 흑백논리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은 어떠한 통일이라도 좋다”고 통일을 절대화하는 통일만능론(統一萬能論)이 휩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아니면 분단”,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도식적인 이분법(二分法)도 등장했습니다. 통일론자가 아니면 분단론자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분단론자는 통일반대론자와 같은 말이 되어 지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흑백논리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허구의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즉, “통일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일인데 통일반대론자들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허구의 논리’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북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엉뚱한 삼단논법(三段論法)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즉,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민족단결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단결에 반대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입니다. 북한 사람들과 남쪽에서 북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삼단논법은 1970년대 초 남북대화 초창기에 북한 대표가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거꾸로 다음과 같이 맞섰습니다. “공산주의를 주장한다는 민족단결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단결에 반대한다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 말이 어떠냐”고 들이댔습니다. 그랬더니 북한 대표는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2. 통일반대론자는 없다 - 있는 것은 통일신중론자일 뿐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을 통일지지세력과 통일반대세력으로 나누어 이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도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이라는 ‘이슈’가 국민을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逆)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는데 이용되고 있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통일반대론자가 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통일에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일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크게 볼 때, 그 차이는 ‘통일지상론’이냐 아니면 ‘통일신중론’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통일신중론(統一愼重論)은 통일에 대한 무조건 반대가 아닙니다.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되,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통일이 ‘내용’면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방법’에 관하여 신중을 기(期)하자는 것입니다. 즉, ‘좋은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되, ‘나쁜 통일’을 수용하는 바보스러운 짓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통일신중론자들을 마치 통일반대세력이나 분단지향세력인 것처럼 매도하는 ‘역(逆) 매카시즘’이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아주 단순화시켜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만 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다분히 주술적(呪術的)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신념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목격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경우에는 어느 사이엔지 통일이 기독교의 ‘낙원’이나 불교의 ‘극락’으로 둔갑하여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온갖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하는 ‘마취제’나 ‘최면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3. 신라의 삼국통일은 ‘속 빈 강정’ - 잃은 것도 많았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古代) 한국의 강토였던 한반도와 만주(滿洲)에는 본래 단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 시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모호했습니다. 그 이후 이 땅에는 고구려(高句麗; BC37-AD668)ㆍ백제(百濟; BC18-AD660)ㆍ신라(新羅; BC57-AD935)의 삼국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羅ㆍ唐) 연합군에 패망하면서 우리 역사상 첫 ‘통일국가’인 통일신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통일국가’로서의 통일신라의 위상은 논란과 시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신라의 삼국통일은 자력이 아니라 외세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꺼풀 속을 드려다 보면, 신라의 통일은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 신라: BC57-AD935
- 고구려: BC37-AD668
- 백제: BC18-AD660
고구려 패망 30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고토(故土)였던 만주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渤海)가 건국됩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신라의 존속기간은 발해가 건국될 때까지의 30년간에 불과합니다. 이때부터 발해가 멸망한 926년에 이르는 228년간의 기간에 우리나라는 북의 발해와 남의 신라로 갈라진 또 하나의 ‘분단국가’였습니다.
게다가 남쪽 신라의 영토 내에서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전개됩니다. 900년에는 견훤(甄萱)의 후백제가, 그리고 다음 해인 901년에는 궁예(弓裔)의 태봉이 등장하여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918년에 태봉에서 정변이 일어나 왕건(王建)이 궁예를 내몰고 고려(高麗)를 개국합니다. 왕건은 935년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다음해인 936년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 통일을 이룩합니다.
4.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 기간은 고려와 조선의 974년간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고려(高麗,936-1392), 조선(朝鮮, 1392-1910)으로 이어지는 974년간의 ‘통일국가’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 역시 완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토가 지나치게 위축되었습니다. 고려 초기에 국토는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 6鎭과 4郡 설치
456년간에 걸친 고려 왕조 대부분도 주로 북쪽의 외세와의 무력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서 연달아 나타난 거란족의 ‘요(遼)’ 나라, 여진족의 ‘금(金’) 나라, 몽골족의 ‘원(元)’ 나라와 끊임없이 무력충돌하면서 국경선을 조금 씩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고려의 국경선이 겨우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新義州) 근처에 도달한 것은 6대 임금 성종(成宗) 때인 993년경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경남도 함흥(咸興) 근방에 6성을 쌓은 것이 15대 임금 숙종 때인 1104년경이었습니다.
1239년부터 시작된 40년간의 대몽(對蒙) 항쟁을 거치면서, 고려는 한 때 원(元) 제국의 부마국가(駙馬國家)로 전락합니다. 이 기간에 ‘원’ 제국이 쌍령총관부(雙嶺總管府)와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함에 따라, 고려의 국토가 옛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때의 크기로 줄어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국토가 두만강까지 확장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400년대 조선(朝鮮) 왕조 4대 임금, 세종대왕 때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숙명적 과제인 나라의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민족사의 큰 흐름 속에서 생각해 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5. 모든 통일이 다 좋은 것 아니다 - 분단에도 양면이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분단’은 유독 우리 세대만이 유일하게 겪는 고통스런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통일’에 이르는 길도 순탄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는 했지만, 과거의 통일은 모두 무력에 의한 유혈통일(流血統一)이었습니다.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외세의 힘을 빌어서 무력으로 달성하는 과오도 범했습니다.
이 같은 통일을 통해 통일이란 목표는 달성했지만, 그 대가로 잃는 것도 많았습니다. 가장 뼈아팠던 것은 국토의 상실이었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이룩하는 대가로 만주라고 하는 광대한 영토를 잃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해야 할 운명의 우리 세대는 이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분단보다 못한 통일을 선택하거나, 또는 분단 상태에서 가졌던 소중한 것들을 통일과정에서 잃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롭게 통일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단 상태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미덕시(美德視)하고 분단을 죄악시(罪惡視)하고 있는 데,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6. 6.25 남침이 남긴 깊은 상흔이 분단의 가장 큰 상처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하여 6.25남침이라고 하는 엄청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김일성의 공산북한은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1950년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전면남침을 감행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3년간에 걸친 ‘6.25전쟁’이라는 이름의 비참한 국제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 국토는 폐허가 되고, 수십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침은 1천만명 이상의 남북의 동포들에게 가족이산이라는 단장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쟁은 1953년 ‘휴전’이라는 형태로 겨우 봉합되었습니다만, 그 후에 한반도에서는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어 불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구호 아래 한-미동맹(韓-美同盟)을 주축으로 하는 ‘전쟁억지력’을 유지함으로써, 겨우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사이비(似而非) 평화”나마 유지해 왔습니다.
또한 남북의 두 동족사회 사이에서는 서로를 거부하는 철저한 단절과 고립 속에서 엄청난 사회적 이질화(異質化)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무력남침과 폭력혁명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남조선혁명’의 구호 아래 대한민국의 공산화(共産化)를 집요하게 추구해 왔습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의 적화통일(赤化統一)의 위협 때문에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인권의 심각한 제약과 갖가지 생활의 불편이 강요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7. 남북의 상반된 선택 - 그 결과가 오늘의 한반도 현실
그러나 이 같은 국토분단ㆍ국가분단ㆍ민족분단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단은 하나의 역사적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1948년 남과 북은 남의 대한민국과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국가의 수립을 통하여 한민족의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상반(相反)된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북의 ‘선택’은 공산주의와 독재,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입각한 명령사회, 그리고 폐쇄와 고립화였습니다. 남의 ‘선택’은 민주주의와 자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경쟁사회, 그리고 개방과 국제화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세대들의 이 같은 선택의 결과는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1948년에 이루어진 남북의 이같이 상이(相異)한 선택의 결과로, 지금 남쪽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발전과 번영의 모습은 정말로 민족사적으로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 지표(指標)를 통하여 확인해 봅니다.
1953년 13억 달러였던 대한민국의 GNP는 2004년에는 그 523배인 6,810억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1인당 GNP는 53년의 67 달러에서 2004년에는 그 211배인 14,162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2004년도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세계 11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 ①미국, ②일본, ③독일, ④영국, ⑤프랑스, ⑥이탈리아, ⑦중국, ⑧스페인, ⑨
캐나다, ⑩인도, ⑪한국
대한민국의 경제는 1954년 처음으로 5.6%의 성장률을 기록한 이래, 1956년과 1980년의 두 해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플러스’ 성장을 계속해 왔습니다. 산업구조는 그 비중이 1차 산업으로부터 3차 산업으로, 경공업 위주로부터 중화학공업 위주로 크게 이동하여 선진국형 산업구조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의 해방 당시와 2005년의 광복 60주년 사이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각종 경제지표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1945년 대비 쌀 생산량이 2.7배, 철강 생산량이 59.400배, 자동차 생산대수가 50만배, 시멘트 생산량이 6,037배, 선박 건조량이 약 1,900배로 늘어났습니다. 수출액은 52년 대비 9,200배로 늘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 분단 당시 경제는 북한이 압도 - 지금은 비교 의미 상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역사적 사실은 1948년 국가분단 당시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45년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 역청탄의 98%, 전력의 92%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또 1960년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1인당 GNP는 94 달러 대 137 달러, 수출액은 3천3백만 달러 대 1억5천4백만 달러로 북한의 경제가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비록 GNP에서는 19억 달러 대 17억 달러로 남이 약간 앞섰습니다만).
그리고 남북한의 본래의 경제구조는 남농북공(南農北工), 남경북중(南輕北重)의 상호보완형으로 북이 주도하는 우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분단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남북한의 경제는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북한의 경제는 북한이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중지했습니다. 1994년 이래 선고만 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은 파산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경제력 비교>(2004년)
- 인구 48백만:23백만 명 = 1/2
- GNI 6,810억:208억 달러 = 1/33
- 1인당 GNI 14,162:914 달러 = 1/15.5
- 무역총액 4,783억:29억 달러 = 1/167
- 수출 2,538억:10억 달러 = 1/149
- 수입 2,244억:18억 달러 = 1/122
- 발전설비 5,996만:777만 kw = 1/7.7
- 발전량 3,421억:206억 kw/h = 1/16.6
- 원유도입량 82,579만:390만 배럴 = 1/212
- 자동차 347만:4,500 대 = 1/771
- 강철 4,752만:107만 톤 = 1/44.5
- 시멘트 5,433만:563만 톤 = 1/9.6
- 비료 361만:43만 톤 = 1/8.3
- 화섬 198만:2.5만 톤 = 1/79
지금 북한의 산업설비 가동률은 30%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굶주린 근로자들이 유휴설비들의 환금가치(換金價値)가 있는 부품들을 모두 뜯어내어 양식과 바꾸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휴설비들은 이제 고철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덜 난 경제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수백만의 주민이 굶어 죽었습니다. 수만명, 어쩌면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몰래 건너서 만주 벌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북에 남은 주민들은 서방세계의 인도적 지원으로 겨우 집단 아사(餓死)를 모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북한이 1차 7개년 계획에 착수한 직후인 1962년 11월, 김일성은 이 계획이 완료되면 북한 동포들에게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1948년에 이루어졌던 남과 북의 상반(相反)된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 미국 Foreign Policy와 Fund for Peace의 ‘2006년도 실패한 국가지수
(Failed States Index)’에서 조사대상이 된 146개국 가운데 북한은 14
위 [수단(1), 콩고민주공화국(2), 코트디봐르(3), 이라크(4), 짐바브웨(5), 차
드(6), 소말리아(7), 아이티(8), 파키스탄(9), 아프가니스탄(10)], 한국은
123위 [독일(124), 스페인(125), 이탈리아(127), 미국(128), 프랑스(129),
영국(130), 싱가포르(133), 일본(135),,, 호주(139), 뉴질랜드(141), 스위스
(142), 아일랜드(143), 핀란드(144), 스웨덴(145), 노르웨이(146)] (‘성공
한 국가지수’로는 23위)
9. 1948년에 통일을 선택했다면 한반도는 이미 공산화
여기서 우리는 1948년의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이 분단이 아닌 다른 것, 즉 무리를 하고라도 우격다짐으로 통일했을 경우에, 오늘의 현실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듯 합니다.
1948년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그 때 우리의 선택이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었다면, 그 선택이 초래한 결과는 다음의 어느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미ㆍ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였던가, 아니면 ‘공산화 통일’이었든가, 아니면 겉은 ‘중립화 통일’이지만 속은 ‘공산화 통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더라도, 그렇게 성취된 ‘통일국가’가 지금 갖고 있을 모습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못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더라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여전히 좌우대립(左右對立)의 사상적 ․ 이념적 혼미 속에서 방황을 계속하고 있거나, 아니면 ‘공산화’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통일국가’가 실현되었더라면, 지금 그 통일국가는 오늘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학생 여러분의 모습은 김정일이라는 독재자를 무조건 숭배하고 찬양하면서 살고 있는 북한의 학생들이나 아니면 ‘농민시장’ 바닥이나 다리 밑을 헤매는 ‘꽃제비’들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KBS-TV의 ‘통일전망대’나 MBC-TV의 ‘남북의 창’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통일된 국가’가 통일은 되었지만 ‘공산화’까지는 되지 않은 나라였다면, 지금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수많은 아시아ㆍ아프리카 신생(新生) 독립국가들의 운명과 같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동안 남북의 두 상이(相異)한 체제 간에 벌어진 엄청난 발전의 격차는 1948년 당시 이승만(李承晩), 김성수(金性洙)와 같은 대한민국 건국주역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인 차선책(次善策)의 차원에서 통일을 “잠시 유보”하면서 분단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분단이 반드시 죄악일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옳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건국 당시 분단의 선택은 곧 ‘체제’와 ‘이념’의 선택이었습니다. 분단을 선택한 결과로 그 동안 남북 간에는 사활(死活)이 걸린 체제경쟁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서로 우열(優劣)을 다투는 치열한 경쟁이었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정글의 규칙이 지배하는 체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북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10. 압축성장으로 체제경쟁 승리 - 그 뒤엔 어두운 그늘도
대한민국은 이 체제경쟁의 승자(勝者)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체제’와 ‘이념’의 승리입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예컨대 박정희(朴正熙)의 “일면 국방ㆍ일면 건설”이나 “잘 살아 보세”와 같은 구호 아래서 “하면 된다”(Can Do)는 정신으로 뭉쳐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결과인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결코 ‘분단’을 미화(美化)하거나 예찬해서는 안 됩니다. 분단은 어디까지나 불가피했던 “차선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단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수많은 긍정적인 일들을 의도적으로 부정ㆍ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자원ㆍ기술ㆍ자본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인력뿐인 불리한 상태에서,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끊임없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발전과 번영을 이룩해 냈습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한-미동맹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던 다른 나라에서도 수백년이 걸렸던 산업화를 대한민국이 불과 2-30년 사이에 이룩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압축성장(壓縮成長)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압축성장에는 사회적 갈등이라는 대가(代價)도 있었습니다. 북으로부터의 안보 위협과 사회적 갈등을 무릅쓰고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의 억압과 인권의 제약,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나는 정치적ㆍ사회적 갈등으로 대한민국은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일단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그 힘으로 오늘날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정착시켜 나가게 된 것입니다.
11. 세습독재의 북한은 세계 최악의 ‘실패한 국가’
반면, 북한은 ‘수령독재’라는 이름으로 봉건왕조(封建王朝)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역사의 유물인 ‘세습독재(世襲獨裁)’를 60년 동안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2천3백만 동포들을 수용소 속의 ‘노예상태’로 묶어 두어 왔습니다. 그 결과로 북한은 오늘날 바깥 세계로부터 고립ㆍ단절된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1948년의 국가분단 시점에서 자원ㆍ기술 모두 남한을 압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국제 평가기관들에 의해 200여 세계국가 가운데서 가장 ‘실패한 국가’의 하나로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개혁ㆍ개방’ 마저 거부하면서 이미 실패해 지구상에서 도태되어 버린 사회주의 명령경제(命令經濟)를 고수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정해야 할 사실은 1945년 이후 남쪽의 우리가 분단을 선용(善用)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본 반면, 북쪽의 저들은 분단을 악용(惡用)함으로써 절망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토분단 63주년, 국가분단 6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체제경쟁의 당당한 승자(勝者)의 입장에서 ‘통일’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리(時利), 즉 시간상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1948년에 ‘분단’이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통일’도 당연히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체제경쟁의 승자인 대한민국의 몫이지, 패자(敗者)인 북쪽의 몫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미 실패한 북의 체제가 무대로부터 퇴장하기 전에 잔열(殘熱)을 불태우는, 다시 말해 임종(臨終)을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종착역을 아는 이상 우리에게는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세기를 넘긴 분단 기간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바야흐로 문이 열리려 하고 있는 새 천년의 유장(悠長)한 시공간(時空間)에 비추어 보면, 수유(須臾), 즉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나무 가지에 달린 채 썩고 있는 감을 굳이 따내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절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12. 통일은 승리한 체제 주도해야 - 당장은 분단관리가 중요
독일통일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통일이 되면 남북 간에 조성된 경제발전의 격차(隔差)는,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간에, 남쪽의 재력(財力)으로 메워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려움은 아직도 우리의 국력(國力)이 당시의 서독만큼 충분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세계 2위였던 구 서독(西獨)의 엄청난 국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통일 이후 최근까지 소화불량성 배탈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지금의 국력을 가지고 ‘독일식 통일’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과연 그로 인한 후유증이 독일의 배탈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自明)합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아직은 설익은 ‘통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력을 더욱 키워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독일식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허리끈을 더 졸라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내부에는 북한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방법론(方法論)의 차원에서 통일 문제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상당히 강합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노력은 도로(徒勞)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극단적으로 이질적(異質的)이고 상호 부정적인 남북의 두 체제가 ‘통일방안’에 관한 합의를 이루어낼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 노력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짓거나 신기루(蜃氣樓)를 쫓는 환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와는 달리 통일될 때까지 거처야 할 일련의 과정(過程)을 착실하게 관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의미하는 것은 한마디로 “분단을 관리(管理)”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통일국가라는 ‘결과’보다는 분단관리라는 ‘과정’에 치중해야할 시기입니다. 분단관리의 단계를 도외시하는 통일국가 논의는 한낱 정치적 선전구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문제를 풀기 위한 우리의 현실적인 노력은 우선 남북 간의 분단상태를 제도화(制度化)하여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북한에서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체제변화가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는 북한의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수령독재체제가 해체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쌍방의 두 상이(相異)한 체제가 통합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할 정도의 “가치의 상사성(相似性)”과 “체제의 상용성(相容性)”이 확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13. 통일은 이제 기성세대가 아닌 새 세대의 과제
분단 및 통일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것은 분단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분단과 통일의 주도세력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분단을 직접 체험한 분단 이전 세대의 전유물(專有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선택(選擇)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當爲)의 문제였고, 이성(理性)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感性)’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분단은 “본래 하나였던 것을 인위적으로 둘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인구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분단 이전 세대는 숫자 면에서 격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구의 80% 이상에게 분단은 그들이 스스로 체험한 ‘직접적 사실’이 아니라, 그 부모 세대를 통하여 전해들은 ‘간접적 사실’일 뿐입니다. 따라서 통일 역시 이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현실적 문제라기보다는, 머리로 오는 관념적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에게 통일은 관념적으로는 ‘절대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상대적’ 이슈로 퇴색하고 있습니다(일부 의식화된 운동권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이긴 합니다만).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북한의 존재를 ‘감성적’ 상대보다는 ‘이성적’ 상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분단과 통일의 문제도 ‘감성적’ 차원보다는 ‘이성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분단이전 세대’에게 원상회복(Status Quo Ante)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재통합(Reunification)의 문제였다고 한다면, ‘분단이후 세대’에게는 하나의 창조적 가치로서 새로운 통합(New Unification)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차이는 앞으로 우리의 ‘통일정책’의 향배(向背)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 하면 인구의 연령별 분포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어제까지는 분단과 통일의 영역이 전전(戰前) 세대인 기성세대의 전관수역(專管水域)이었지만, 이제는 전후(戰後) 세대인 신세대의 영역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
[출처]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작성자 포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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